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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새벽 5시경 함정리 달봉산에서 총을 쏘면서 들어와 송사리 송계 뒷산을 거쳐 동암태 봉우리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오전 10시경에는 동암태 에서 군유산에 기관총 공격을 하였습니다. 저는 새벽에 총성을 듣고 삼천 동 방향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군유산에 올라가면서 사간동 끄트머리에 있 는 밭에 총탄이 떨어지는 것도 보았습니다."4지 “주포 방향에서 경찰의 총격이 시작되자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손불면 북성리 사기마을 방향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경찰을 만났습 니다. 경찰이 군유산 정상으로 올라가라고 하여 올라갔다가 면소재지로 내 려와서 주먹밥을 먹고 다음날 집에 돌아왔습니다. 군유산에 도착하였을 때 는 영광, 신광, 주포 쪽에서 밀려온 경찰로 군유산이 꽉 갔습니다."4키 한편 함평이 수복된 1950년 10월 22일 이후 인근지역인 해보면 광암리 용천 사에는 ‘빨치산불갑지구사령부’가 있었다.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는 군유 산작전 다음날인 2월 20일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 일대 소탕전’을 벌였다. 군 경은 대규모 토벌작전을 위해서 2월 19일 자정부터 신광면을 포함한 불갑산 주변 지역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4찌 냐. 빨치산 동 좌익세력의 장황 1950년 11월부터 군경 토벌작전의 결과 빨치산과 지방좌익 등 좌익세력은 불갑산, 군유산 인근으로 집결하여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가족들을 불러들 이기도 하였다. 지방좌익은 손불 북성리 차경마을과 신광 송사리 삼천동 등 군유산 인근 마을에서 생활하였는데 보초를 세워 군경의 토벌작전에 대비하 였다. 또 경찰의 토벌작전이 있을 때는 비상연락망을 가동하여 빨치산불갑지 구사령부와 연계하여 경찰에 대응하였다. “차경마을에는 무안에서 올라온 지방좌익(무호대)이 있었는데 이들이 우 리에게 피난을 가야 한다고 압박하였습니다. 지방좌익들은 차경마을 한 가 운데에 5칸 집을 지어놓고 그곳을 본부로 삼았습니다. 그 자리가 북성리 42) 참고인 김채섭 진술조서(2008.8.21.) 43) 참고인 김남수 진술조서(2009.3.1.) &14) 진싫화해웹원회, 불갑산지역민간인희생사건 진실규명결정(2008.12.23.) - 6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