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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군유산에 본부를 두고 출몰하는 적 300여 명(무장 80명)38)에 공격하였 다’고 기재되어 았다. 또 「한국경찰대일일보고서 1 J 의 ‘적 무장 80명’은 경찰 수집 정보로 보이 는데 당시 군유산 인근의 접근이 차단되어 경찰은 마을 이장이나 ‘밀대’를 통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에 대하여 함평지역 참전경찰 청금용은 “경찰 이나 면사무소에서는 마을 이장이나 경찰이 심어놓은 ‘밀대’를 통하여 정보 를 수집하는데 이 사람들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고 진술하였 다.3키 군유산의 무장빨치산 규모에 대해서 송사리 주민 김채섭은 당일 무장빨치 산 10명 정도가 영광군 염산면 쪽으로 도주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하 였다.40) 또 송사리 삼천동 주민 주육손은 “군인가족이어서 오전 11시경 경찰 을 따라 군유산에 올라왔는데 그때 빨치산은 없었다”고 진술하였다.41) 주민 김채섭과 주육손의 진술로 미루어 보았을 때 당시 ‘적 무장 80명’은 그 규모 에 의문이 든다. 이날 신광면 계천리 경찰고지에서 출발한 함평경찰서 기동대는, 신광면 함 정리에서 군유산에 총격을 가하면서 보여리를 거쳐 군유산으로 올라갔고, 함 평읍 주포에서 출발한 함평경찰서 기동대도 손불면 소재지인 대전리, 월천리 를 지나면서 군유산에 공격을 가하였다. 또 영광군 군남면 방향에서 올라왔던 영광경찰서 기동대는 영광군 염산면 방향으로 퇴로를 열어주며 군유산에 진출하였다. 사건 당시 신광면 송사리 사간동 김채섭과 손불면 산내리 내감마을 김남수 의 진술이다. 38) 한국경찰일일보고서의 ‘무장 80명’은 적정을 정확하게 보고하기 보다는 실제보다 확대하여 보고된 측면이 었다. 이 자료는 군유산작전 이후 경찰토벌대로서 지리산지역 토벌작전에 참전한 참고인 의 진술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안사람들이 들어와 있다고 하니 경찰이 과대평가하여 수복이 늦게 되었습니다. 결국 군유산은 ‘경찰이 키워서 잡아먹었다’는 말이 맞습니다. 제 생각에는 손불 변 소재지만 수복하고 군유산은 그대로 두었어도 무안사람들은 도망갔을 것입니다" 참고인 김균 배 진술조서(2009.8.6.) 39) 참고인 정금용 진술녹취(2007.12.6.) 40) “군유산작전 때 군유산에서 무장빨치산을 보았던 것은 동암태 부근이었는데 동암태 봉우리 100여 미터 앞에서 10명 정도의 무장빨치산이 지나갔는데 경찰이 쏟 총에 그 사람들 중 1명이 총을 맞 고 멈칫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뒤 그 빨치산은 일어나더니 일행을 따라 영광 염산면 방향으 로 도주하였습니다" 참고인 김채섭 진술조서(2008.8.21.) 41) 참고인 주육손 통화보고(2009.10.7.) - 6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