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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고모 댁에 피신하였음. 음력 정월 8일 반란군 청년단원 안병문에게 잡혀 불 갑산으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고 용천사 앞 운암마 을토굴에 있었음. 군유산에는 작전 다음날 갔는데 시신만 보았으며, 불 갑산 작전 일에는 군유산으로 후퇴를 하였다가 불갑 산으로 돌아왔음. 이후 조계산으로 후퇴하였다가 경 찰토벌대에게 잡혔음. - 소재지 대행동 고모 댁에 있었을 때 낮에 왕래하면서 보았는데 군유산에서 반란군을 볼 수 없었고 단지 무 (1어 | 함평군청 |조서 |경찰l 안 사람들이 경찰에 쫓겨 와서 갈 데가 없이 있었음 라.자료조사 - 1950년 12월 12일 작전에는 양재리 장재동 주민이 대 행동까지 피난을 나왔는데 그때 경찰이 주민들을 주 포까지 데려다 총살하였음. - 1950년 12월 12일 작전은 현지 경찰과 경상도에서 온 기동대였음. 기동대는 해병대였는데 인정사정없었음. 당시 손불지서 경찰력은 100명 정도였으며 지서장은 한길수였음. - 주포사건은 음력 동짓달 초 반란군과 경찰의 전투가 있었는데 반란군의 주포 점령 소식을 듣고 석창리 주 민이 밥을 가지고 주포지서로 가다가 경찰을 반란군 으로 1) 한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빨치산 자료집.!I 3, 1996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 『빨치산 자료집.!l 3권 문컨편(3) 『한국경찰대 일일보고서.!l 1 (1951.1.1O~4.30.)를 참조하였다. 한국경찰대 일일 보고서는 빨치산의 동향, 경찰과 빨치산과의 교전 내용을 한국경찰이 보고하 여 이를 미군이 정리한 문서이다. 이 자료집 247쪽에는 1951년 2월 19일 전남남도경찰국 기동대와 함평과 영 광경찰서 기동대의 빨치산 토벌작전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2) 함평군, 『함평군 한국전쟁기간 민간인희생자 피해연구보고서.!I, 2006 『함평군 한국전쟁기간 민간인희생자 피해연구보고서JJ(이하 피해여구보고서) - 6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