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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적인 가해자를 확인하기는 불가능하였다. 이 때문에 본 결정서에서는 가해주체를 지방 좌익, 분주소원r 빨치산 등으로 포괄적으로 표현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는 마을에서 이장을 하던 사람이 희생당한 사건이 많았고 총살이 많았다. 그리고 인민군 점령기에 발생한 사건을 보면 미처 피신을 하지 못한 경찰(의용 경찰), 공무원 및 우익인사들 등이 분주소원을 포함한 지방좌익들에게 끌려가서 인민재 판식으로 희생당했으며 총살당한 경우가 역시 많았다. 윌야면 월야분주소y 대동면 대동 분주소y 학교면 학다리 장터에서 발생한 사건이 그 경우이며y 나산면 나산다리에서 발생 한 희생사건의 경우도 인민재판으로 희생된 사건임을 짐작할 수 있다.314) 인민군 퇴각시기인 10월 초순경에 대동분주소에 감금되어 있던 의용경찰 및 우익인사 들이 지방좌익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건 등이 발생했으며y 함평이 수복되기 전까지 낮에는 경찰y 밤에는 빨치산들이 활동하는 시기가 한동안 지속되어 지방 좌익y 빨치산에 의한 희생사건이 많이 발생하였다. 인민군 퇴각이후가 되면 주로 좌익이나 빨치산들에 의해 죽창y 대창y 칼/ 절구대y 몽둥 이(다듬이돌)로 희생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인민군 점령기 때에 비해 가족 단위로 희생당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는데y 경찰y 이장/ 공무원 등을 한 당사자들보다 경찰, 이장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희생당한 경우가 많았다. 불갑산/ 군유산을 끼고 있는 함평지역의 특성상 그곳을 중심으로 빨치산들이 수복이후 에도 계속 활동하였으며/ 빨치산들의 활동은 1951. 2월 군경의 토벌작전이 벌어질 때까 지 계속되었다. 나. 가해이유 희생자들은 해방 후 어수선한 좌우익의 대립 하에서y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특정한 하나의 이유로 희생당했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희 생당했다고 판단된다. 한국전쟁 발발 전 함평지역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주로 마을이장이었다. 그 후 언민 군 점령기나 퇴각기/ 퇴각 이후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경찰/ 이장315) 및 그 가족들/ 공무 314) 이러한 각 희생지에서 진실규명대상자 뿐만 아니라 희생자 수가 더 많이 있었다고 참고인들은 진술 하고 있으나, 그 후손들이 그 지역에 살고 있지 않고 연락처를 수소문하기가 쉽지 않아 추가적으로 미신청희생자를 밝히기 어려웠다. 315) 함평지역의 희생자 가운데 이장을 했던 사람이 16명이나 된다. 물론 경찰, 공무원을 한 사람도 13 명, 대한청년단도 4명이 있긴 하지만 이장을 했던 사람의 희생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5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