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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000은, 당시 경찰 측에서 마을사람들에게 야경을 서라고 요청했는데I 빨치산들 의 습격에 대비하여 대동지서에 돌로 담을 쌓고 돌 담 바깥으로는 대나무로 둘러싸서 총알이 날아와도 총알이 횡겨나가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야경을 서는 사람들은 지서 주변에 구덩이를 파놓고 거기 들어가서 야경을 섰다고 한다.276) 신청인 조병율은 아버지 조홍원이 대한청년단으로 활동했으며 희생당한 다음날 소식 을 듣고 희생당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또한 신청언은y 방망이로 머리를 맞아 사망 한 아버지 조홍원의 시신을 직접 목격하고 가족들과 수습했다고 한다.277) 16) 나산면 잠축리 고판문 희생사건(마-2867, 1951.1.1.) 1951.1.1.(음력11.24) 나산면 삼축리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고판문(高判文, 45)이 마을에서 야경을 서다가 빨치산에 의해 희생당했다. 참고인 000은 고판문이 마을이장이었고,278) 당시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며 야경을 섰는데 사건 당일은 고판문이 야경을 서는 날이었다고 진술했다)79) 그리고 참고인 000 , 000는y 고판문이 소금장사를 했는데/ 소금을 팔기 위해 여 기저기를 다니고 면소재지에도 자주 드나드니까 경찰의 스파이 노릇을 한다고 소문이 나서 좌익들한테 희생당했다고 진술했다)80) 이로 볼 때 고판문은 단지 야경을 서다가 희생당한 이유 외에도, 이장을 했고 소금 장사를 하면서 경찰의 스파이라는 오해를 사는 등y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빨치산에게 희생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인 000은 당시 나산지서 근처에서 야경을 서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판문의 시신을 발견하고 그 가족들한테 알려주었다고 한다)81) 참고인 000 역시 l학도의용대/ 소속으로 나산지서에서 야경을 서다가 집에 가는 길y 삼축리에서 나산국민학교로 가는 셋길에 있는 뱃가에서 고판문의 시신을 보았는데, 그때는 시신인줄 몰랐다가 나중에 들어보니 고판문의 시신이었다고 한다.282) 진술조서 (2009.6.30) J 276)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6.30)J 277) r신청인 조병율 진술조서 (2008.2.21 )J 278) r신청인 고안순 진술조서 (2008.3.12) 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9)J 279)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J 280)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J 281) r참고언 000 진술조서 (2009.4.28)J 282)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J ; 지금은 뱃가가 없어지고 농경지로 바뀌었다. - 5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