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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는데잭1) 당시 빨치산들이 김덕근의 집을 습격하여 김병용을 찾았으나 없자 김덕근 을 대 신 끌고 갔다고 한다.2 52) 신청인 김병일은 아버지 김덕근이 끌려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으며y 시신수습은 몇 달 뒤에 했는데 여러 시신들 틈에서 덧버선 바느질 상태로 찾았다고 한다.253) 1이 선광면 복홍리 섬기찬 희생사건(마-10807, 1950.11.28.) 1950.11.28(음력10.19) 신광면 복흥리 복치마을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심기찬(沈 模燦, 3η이 빨치산에 의해 희생당했다. 언민군 점령 후 좌익들에 의해 동네 젊은이들이 끌려가거나 희생당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자 심기찬을 비롯한 젊은이들은 밤에는 다른 곳에서 자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는 생활을 계속했다. 사건 당일 섬기찬과 마을 청년 2명이 신광면 복흥리 석 계마을 건너편 분산동에서 자고 집으로 오던 길에 빨치산과 마주쳐서 섬기찬 일행은 그들에게 “경찰의 연락원”라는 오해를 받고 그 자리에서 희생당했다.25에 분산동에 거주하는 사람들로부터 섬기찬이 희생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섬기찬의 시신 은 섬기찬의 아버지와 동생이 가서 수습해 왔다.255) 11) 손불면 북성리 박재용, 박경상 희생사건(마-4564, 4559, 1950.11월경/1950.12.25) 1950. 11월경/ 손불면 북성리 사기마을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박재용(朴再容, 18) 과 1950.12.25.(음력 11.1η 박경상(朴京相, 20)이 빨치산에게 끌려가서 행방불명되었다. 박재용의 당숙 박귀근이 광양에서 경찰을 했는데 박귀근 혼자만 광양에 가서 생활하 고 나머지 가족들은 사기마을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밤마다 좌익들이 와서 박 귀근이 마을에 오지 않았는지y 어디 있는지y 묻곤 했으며,256) 박귀근의 형제도 빨치산들 251) 전남지방경찰청에 김병용에 관해 조회를 의뢰했으나 관련기록이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2009.7.진 실화해위원회/회신 2009.8.) 252)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7)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7)J ; 참고인들은 진실규 명대상자의 이름을 김덕근이 아니라 김원근(또는 김일근)으로 알고 있었으나, 신청인에게 재차 확 인하고 제적부상으로도 김덕근이 맞다. 253) r신청인 김병일 진술조서 (2008.3.13)J 254) r신청인 심위섭 진술조서 (2008.2.21)J ; 심기찬과 같은 날, 마을 청년 2명도 같이 희생당했다고 하나 그 2명에 관한 기타 정보를 입수할 수 없었다. 255) r신청인 심위섭 진술조서 (2008.2.21)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8.5)J 256) r신청인 박길용 진술조서 (2008.6.25) J - 5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