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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했다. 백한봉 가족은 손불면 학산리 지호마을에 거주하다가 전쟁 전 백한봉의 처가가 있는 영광군 염산면 신성리로 이사를 갔다가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그곳에서 희생당했다. 참고인 000 의 진술에 의하면y 백한봉의 처남이 경찰이었는데,244) 그 처남이 함평 과 영광의 경계지점인 “돌팍재”라는 곳에서 작전 중에 사망한 사건이 있었고y 백한봉 가족은 그 때문에 좌익들의 습격을 받고 희생당했다고 한다.245) 이로 볼 때 백한봉 가족 4명은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y 인민군 후퇴기에 영광군 염 산면 신성리에서 빨치산들에게 희생당했고 시신수습은 마을사람들이 했다.246) 8) 손불면 석창리 김홍식 희생사건(마-4278, 1950.11.15.) 1950.11.15. 손불면 궁산리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김홍식(金洪植, 20)이 좌익들에 의해 석창리의 산으로 끌려가 희생당했다. 당시 김홍식은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녔으며씩끼 집안이 부유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반 동분자로 취급받아 좌익에게 끌려가 창에 찔리고 맞아서 희생되었다고 한다.248) 김홍식과 같은 날 마을 사람 20여명이 석창리 산으로 끌려갔는데 김홍식 혼자만 희 생당하고 나머지는 돌아왔다고 한다.249) 김홍식의 시신은 한참 후에 가족들이 수습했는 데 시신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나 졸업한 목포성경학교의 허리띠와 옷에 매달고 다나던 쾌종시계로 알아봤다고 한다)50) 9) 군유산 김덕근 희생사건(마-6122, 1950.11.25.) 1950.11.25.(음력10.16)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김덕근(金 德根, 44)이 빨치산에게 끌려가 군유산에서 희생당했다. 김덕근의 동생 김원근이 면사무소에 근무했고 김덕근의 아들 김병용(金炳龍)이 경찰 244) 참고인 000는 백한봉의 처남이 김씨였다는 것만 기억날 뿐 이름은 모르겠다고 진술했다. (2009.8.5) 245)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8.5)J 246)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8.5)J ; r참고인 000 전화면담(2009.8.12)J 247) 신청인 김관식은 김홍식이 한신대학교의 전신인 ‘서울신학대학’을 다녔다고 진술했으나, 한신대학 교는 1940.4월 조선신학교로 출범하여. 1951 년 ‘한국신학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즉 서울신 학대학이라는 명칭은 없었다. 따라서 본 결정서에서는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녔다고 표현하였다. 248) r신청인 김관식 진술조서 (2008.3.13)J 249) r신청인 김관식 진술조서 (2008.3.13)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3.18)J 250) r신청인 김관식 진술조서 (2008.3.13)J 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