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page

에서 발생한 사건내용은 다음과 같다. @ 김덕봉 등 5명 희생사건(마-1107, 1108, 2234, 2236, 2237, 1950.10.28.)215) 1950.10.28.(음력9.18) 신광면 가덕리 가리마을에 거주하던 김덕봉(金德、奉, 24), 조낙균 (曺洛均, 25), 박봉훤(朴奉圖, 22 , 일명 박봉선),216) 김종순(金宗順, 34) , 엄성환(任成煥y 29) 등 진실규명대상자 5명이 좌익들에 의해 원산리 덕동마을로 끌려가 희생당했다. 참고인 000은, 사건 발생 하루 전 빨치산의 연락책이 와서 희생당한 5명에게 “집 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하며 만약 도망가면 가족들을 모두 해치겠다”고 해서 도망도 못가고 있다가 끌려간 것이라고 진술했다.217) 당시 마을을 습격한 빨치산들이 5명뿐만 아니라 닭r 돼지 등 가축들도 끌고 가고,218) 집안에 있는 그릇과 살림살이y 심지어 우물 속에 감춰둔 것 까지 모조리 건져내어 가 는 등 동네가 난리법석이었다고 한다)19) 김펙봉은 가덕리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김덕봉의 형 김복은(일명 김영복)이 한 국전쟁 발발 전 마을에서 이장을 하고 사회활동도 했다고 한다.22이 참고언 김화연은y 한 집에서 두 명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하며 빨치산들이 김덕봉의 형 대신 김덕봉을 끌고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진술했다.221) 김덕봉은 사랑방에서 자고 있다가 손이 묶여 끌려갔으며 신청인 김재술은 나중에 죽 창으로 온 몸을 찔린 작은 아버지 김덕봉의 시신을 목격했다. 그리고 김덕봉의 시신은 김덕봉의 형이 수습했다.222) 조낙균은 농사를 지었다는 것 외에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좌익활동을 같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지역출신 좌익에게 개인감정을 샀다고 한다.223) 215) 신청인 및 참고인들은 김덕봉 등 5명이 같은 날 끌려가서 희생당했다고 했는데 희생일자가 음력 9.19과 음력 9.18로 나뒤었다. 이는 같은 곳에서 희생당한 심기운, 심기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 결정서에서는 진실규명대상자들의 제사일이 음력 9.18이어서 제사일을 희생일자로 했다. 216) 진실규명신청서에는 “박봉선”으로 신청하였고 참고인들도 “박봉선”이라 했다. 하지만 박봉선의 제 적등본상 이름은 “박봉훤(朴奉뭘)"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혼선이 있었는지 판단할 수 없어 본 결 정서에서는 제적등본상 이름에 따르기로 한다. 217) I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7)J 218) I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8.3.13)J ; 219) I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7) J 220) 참고인 000는 한국전쟁 당시 마을이장은 임성옥이 했으며, 김복은이 이장을 한 것은 그 이후라고 진술했다(2009.8.5) 221) I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7)J 222) I신청인 김재술 진술조서 (2009.4.7) J 223) I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7)J - 5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