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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오봉의 매제인 백영빈이 손불면 학산리 이장이었는데 좌익들을 피해 처가가 있는 석창리로 피난을 왔다. 좌익들이 백영빈을 찾아 최오봉의 집으로 왔으나y 백영빈이 없 자 그 대신 최오봉을 손불지서로 끌고 갔다. 그러다가 좌익들이 후퇴하면서 손불지서 에 불을 질렀고 감금되어 있던 최오봉이 희생당했다.195) 집안사람들이 최오봉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지서에 갔지만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시신을 찾을 수 없어서 재를 한 줌 가져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96) 3) 대동면 용성리 박남례 얼가 6명 희생사건(마-710, 1950.10.26.) 1950.10.26. 대동면 덕산리 외덕마을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박남례(朴南禮, 26) 및 그 시동생y 시누이 등 일가족 6명이 대동면 용성리 금성동 가는 길인 재너머리에서 좌익들에 의해 희생당했다. 신청인 및 참고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박남례의 남편 김영한이 경찰이었고까9끼 한국전 쟁 발발 후 박남례는 친정이 있는 용성리 금성동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 간 금성동으로 몰려온 좌익들에 의해 박남례를 비롯하여 시동생 김영목(金永種l 21), 김영목의 부인 김순영(金順令, 18), 시동생 김해용(金海龍, 14), 그리고 시누이 김영 자(金永子, 17), 김용자(金龍子, 14)가 희생당했다)98) 당시 박남례와 김순영은 엄신한 상태였다)99) 참고인 000은 박남례 등 6명은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희생당했으며y 시신은 박 남례의 남편 김영한 등이 희생당한 곳에 묻었다고 한다.20이 대동면 덕산리 출신 좌익 000 의 재판기록에 “1950.10.26 ....... 대통면 당책 000 의 지휘로 자위대원 000 외 18명 등이 거면 금성동 부락에서 부락에 도피 중인 경 195) I신청인 최점용 진술조서 (2008.6.10)J ; I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8)J ; I참고인 000 전 화면담(2009.7.)J 196) I신청인 최접용 진술조서 (2008.6.10)J; I참고인 000 진술녹취 (2009.8.5)J ; 11'6.25사변피살자명 부』 에 “최오봉(崔五뿔, 男, 48, 10.13, 손불면 대전리" I피해연구보고서」 에는 “최오봉, 男, 농 업, 47-48, (음)1950.9.14. 손불지서”에서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11'6.25사변피살자병부』 에 서의 최오봉의 한자이름은 오기(誤記)이다. 197) 전남지방경찰청에 김영한에 관해 조회를 의뢰했으나 관련기록이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진실화해 위원회 2009.8.5/회신 2009.8.17). 198) I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2.25)J ; I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8.3)J 199) I신청인 안명환 진술조서(2008.6.5)J ; 참고인 000은 사건 당일, 김영한의 부인과 여동생 2명 이 희생당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을 하던 김영한의 가족이 희생당했다는 사실만 알 뿐 구체적으로 누가 희생당했는지는 모르고 있어서 관련 진술만 채택하기로 한다.(2009.6.3이. 200) I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8.3)J ; I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2.25)J - 5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