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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시끌해서 나가보니 현재 율동마을 회관 자리에서 윤상규가 죽창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아서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82) 참고인 000은 당시 현장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본인도 그 자리에서 온 몸을 찔 리고 맞았으나 다행히 도망쳐서 무사했다고 한다)83) 그리고 시신은 동네사람들과 윤상 규의 어머니가 수습했다)84) 라. 인민군 퇴각 이후 1950.10.22. 함평이 수복되었지만 수복 후의 치안상태는 매우 불안하여r 불갑산 등지 로 피해간 좌익들(빨치산)이 밤마다 각 읍 · 면의 지서를 습격하고 민가에 들어가 식량 등을 약탈해 가는 일이 계속 발생했다.185) 또 수복상황은 각 지역마다 달라서 손불면y 신광면 일부는 1951.2.19.(음력1.14)에 있 었던 I군유산 작전y에 이르러서야 수복된다. 낮에는 경찰y 밤에는 빨치산들이 활동하는 시기가 한동안 계속되었고y 빨치산 활동이 잠 잠해지는 것은 1951.2.20(음력1.15)에 았었던 대토벌 작전언 이른바 /대보름작전I이후이다. 이 시기에는 지서주변에서 야경을 서다가 희생당한 사건,186) 경찰가족이라는 이유 로 일가족이 희생당한 사건, 불갑산 및 군유산 등지로 끌려가 희생당하거나 희생당 했다고 추정되는 사건 등이 발생했다. 1) 대동면 향교리 권승얼 희생사건(마-10819, 1950.10.22.) 1950.10.22. 당시 함평면장이던 진실규명대상자 권승일(權承一, 5꺼이 좌익들에 의해 대동면 향교리 향교저수지 뒤편 산으로 끌려가 희생당했다. 권승일은 희생당하기 전에 182) 참고인 오순임 진술조서 (2009.6.10)J 183) 참고인 오순임은 “사람 목숨이 뭔지, 남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도 내가 살려고 도망쳤다”며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2009.6.10). 184) r참고인 오순임 진술조서 (2009.6.10)J ; 윤상규는 「피해연구보고서」 와 r6.25사변피살자병부』 에 등재되어 있는데, r6.25사변피살자명부』 에는 “윤상채”로 되어 있다. 185) 함평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사.J ,1992, 69쪽. 186) 예를 들어, 나산면 각 지역의 참고인 진술에 의하면 함평수복 후에도 나산지서가 여러 번 빨치산 들에 의해 습격을 당하자 지서에서 나산면 각 마을사람들에게 야경(보초)를 서게 했는데 당시 나산 지서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둘러서 보초를 서다가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지서에 연락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r참고인 000/000 진술조서 (2009.4.29)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 J ) - 5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