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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현채는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지을 정도로 잘 사는 마을지주였으며/ 나주 공산 면으로 금을 캐러 다니기도 했다 17끼 이렇게 볼 때 박현채는 마을유지이며 부유하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좌익들의 표적이 되어서 희생당했다고 판단된다.178) 9) 학교면 사거리 정정환 I 윤상규 희생사건(마-4571, 4572, 1950.10.17.)179) 1950.10.17.(음력9.끼 학교면 사거리 율동마을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정정환(鄭廷 煥, 24)과 윤상규(尹相奎, 33, 일명 윤상채)가 좌익들에 의해 마을에서 희생당했다. 당시 광주/ 목포 간(間) 도로가 지방폭도들에 의해 파괴된 사건이 있었고 그 다리를 보수하는데 마을사람들이 동원되었다. 거기에 동원된 사람 중에 "군인들이 많이 들어 왔으니 빨리 태극기를 달라”고 해서 태극기를 단 집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좌 익들이 마을을 수색하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끌어내어 때리고/ 숨었다가 잡힌 사람들은 끌고 가기도 했다.180) 정정환은 학다리에서 교사를 했는데/ 사건 당일 마을에 들어온 좌익들을 피해 도망 가다가 집 근처에서 몽둥이로 맞고 죽창에 찔려 희생되었고 시신은 정정환의 어머니와 부인이 수습했다.181) 참고인 000은y 남편 윤상규(일명 윤상채)가 대한청년단으로 활동했으며 사건 당일 저녁을 먹으면서 “군인들이 오니까 누가 입초를 서라 한다” 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밖이 177)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6.10) 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3.19)J ; 박현채의 희생사 건에 대해, 신청서에는 윤상연이 끌려가면서 이웃에 살던 박현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박현채도 같이 꿀려갔으며, 박현채의 시신은 옥동마을에서 찾았다고 되어 있으나 신청인 진술조사가 불가능 하여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윤상연 희생사건의 신청인 윤순자나 참고인들로부터 그와 같은 진술을 들을 수 없어서 본 결정서에는 참고인의 진술로만 구성하였다. 178) r피해연구보고서」 에, 윤상연은 “남, 농업, 51 , 1950.10.1 1.월봉마을 가는 길”에서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박현채는 「피해연구보고서」 에서는 ”남, 농업, 39, 1950.10.13, 대동면 옥동마을 앞 강물“에서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 있고, 또 11"6.25사변피살자명부』 에는 ”남, 47, 10.14. 학교 면 사가리(원문) 자택“에서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나이와 희생장소가 다르지만 진실규명대 상자 박현채와 동일인물로 판단된다. 179) 정정환은 교사, 윤상규는 대한청년단원이었지만 사건 당일 그들을 노리고 지방좌익들이 마을에 들어 온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참고인 김우범은 윤상연, 박현채의 경우는 좌익들이 노리고 마을에 왔지 만 정정환, 윤상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정정환, 윤상규는 사건 당일 마을에 들어온 좌익들 을 피해 도망가는 과정에서 희생당했다고 판단된다. 18이 「참고인 김우범 진술조서 (2009.3.19)J ; r참고인 윤병율 진술조서 (2009.2.)J ; r참고인 오순임 진 술조서 (2009.6.10)J 181) r신청인 정병수 진술조서 (2008.2.20)J ; r피해연구보고서」 에 정정환은 “남, 학교서기, 25, 1950.10.15. 박현채씨 집 담장”에서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11"6.25사변피살자명부』 에도 정 정환은 등재되어 있는데 이 명부에는 정정환이 “학교면 사거리 자택”에서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있다. - 5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