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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고 희생당했으며 제사가 음력 8.25로 노점돌과 같다.161) 그리고 1950.10.11.(음력 9.6) 박하진의 첫째아들 박준용(朴俊用, 33)이 좌익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 희생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1950.10.21.(음력 9.11) 박하진의 부언 이 대천(李大果, 60)이 광영마을 앞에서 희생당했다.162) 박하진의 부인 이대천과 셋째 아들 박준필의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했으나 y 첫째 아 들 박준용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163) 이로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노점돌과 같은 날 좌익들에 의해 미신청희생자 박준필이 희생당하고y 그 후에 이대천은 광영마을에서, 그리고 박준용은 어디론가 끌려가 희생당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대동면 대동분주소 희생사건(마-10809, 1950.10.9.) 1950.10.9.(음력8.28) 함평군 대동면 덕산리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이직헌(李直 憲, 22)이 대통분주소로 끌려가서 감금되어 있다가 대동분주소 근처 재너머리에서 희생 당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분주소에서는 마을에서 이장을 했거나 경찰 등y 우익활동을 한 사 람들을 분주소로 불러들여 자수하라고 했다. 그래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대동지서 의 의용경찰이었던164) 이직헌은 자수했고 분주소에 감금되어 있다가 희생당했다. 이직헌과 같은 날/ 같은 마을에 살던 군청직원 이충헌(李忠憲, 34), 대한청년단장 이 돈식(李敎植, 25),165) 대한청년단원 이돈표(李敎杓, 27), 상업을 하던 이돈형(李敎炯, 4이,166) 이돈형의 둘째 부인(성명불상), 장성댁 박씨(이름불상/ 기독교인, 41)도 분주소로 불려가서 161) 참고인 000 전화면담(2009.7.22) 162) ‘노점돌 희생사건(마-7561)’의 참고인들은 노점돌과 같은 날 박하진의 가족이 희생당했다고 진술 했으나, 박하진의 손자인 000와 전화면담 결과 모두 같은 날에 희생당한 것이 아닌 것으로 파 악되었다. 163) 1r6.25사변피살자명부』 에, “이대천(李大果) . 남. 58. 7.3 나산면 구산리” “박준용(朴準用). 남. 35. 9.3 나산면 구산리 자택” “박준필(朴準弼) . 남. 20. 35, 나산면 구산리 자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대천의 성별이 남(男)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내용으로 볼 때 여(女)의 오기(誤記)이다. 164) 참고인 000.000 등은 이직헌이 청원경찰이었다고 진술했다. 전남지방경찰청에 이직헌에 관해 조회를 의뢰했으나 관련기록이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진실화해위원회 2009.8.5/회신 2009.8.13). 이직헌 정식경찰이 아니라 의용경찰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65) Ir전국순국반공청년운동자명부』 에 이돈식은 “한청 함평군 감찰부원”으로 기재되어 있다. 166) r피해연구보고서」 에 이돈형은 “男, 40, (음) 1950.8.28. 용성리 산기숨”에서 희생당했다고 기재되 어 있다. 1r6.25사변피살자명부』 에는 “男 , 42. 1950.5.7. 대동면 덕산리 자택”에서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r피해연구보고서」 의 기록이 희생일과 희생장소 변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5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