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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y 이재양(李載亮, 54)과 이재양의 셋째아들 이준행(李灣行, 2이y 넷째 아들 이병영(李 炳榮, 16)의 사망일자가 “1950.9.11."로 같은 등y 당시 같은 날 희생당한 “3부자”로 판단 된다. 이로 볼 때 이재윤은 마을의 유지였고 우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희생당했으며, 이 재윤과 같은 날y 같은 장소에서 이재윤의 일가 이재양과 이재양의 셋째아들 이준행y 넷 째아들 이병영이 희생당했다. 그리고 시신수습은 이재윤의 형 등 가족이 했다.15이 4) 나산면 구산리 노점돌 희생사건(마-7561, 1950.10.7.) 1950.10.7. (음력8.26) 나산면 구산리 삼성마을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노점돌(盧J면 突, 43)이 좌익들에 의해 광영마을 뒤 산으로 끌려가 희생당했다. 참고인 000은r 당시 좌익들이 마을에 삐-라를 붙이고 다녔는데 그것을 이장인 노 점돌이 떼어내는 일을 반복하게 되자 자연히 좌익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참고인 000은 노점돌의 바로 옆집에 살았는데 노점돌이 끌려간 다음 날 아침 난리가 났으며y 밤에 좌익들이 여러 명 몰려와서 온 집안을 뒤져서 노점돌을 끌 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15끼 노점돌은 광영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죽창에 찔려 희생당했으며y 시신은 끌려간 다음 날 노점돌의 부인과 일가친척들이 수습했고 제사는 음력 8.25이다.15에 한편, 노점돌과 같은 날/ 구산리 광영마을에 살던 구장 박하진159)의 셋째 아들 박준 필(朴準弼, 22)이 광영마을 밭에서 희생당했다.160) 노점돌이 구산리 삼성마을에서 광영 마을로 끌려오면서 박준필에게 도망가라고 소리를 쳤다고 하는데 박준필이 미처 피하 희생당한 것으로 나란히 기재되어 있다. 이준행의 한자이름이 다르고, 제적등본 상으로는 이병영은 이재양의 넷째아들이다. 또, 「희생연구보고서」 에는 “이오행, 교사, 20대, 1950년 겨울, 마을 앞 하천부지”라고 기재되어 있고, “이오행의 부친(50대 중반), 이오행의 형 (30대)"도 같이 희생당한 것 으로 기재되어 었다. 156) ,-신청인 이칠행 진술조서 (2008.2.20) j 157) ,-참고인 。。。 진술조서 (2009.5.26)j 158) ,-신청인 노병운 진술조서 (2008.3.1) j ; ,-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5.22)j 159) 참고인 000은 박하진이 구장을 했으며 노점돌과 같은 날 박하진의 가족이 희생당했다고 진술했 다.(2009.5.26). 16이 참고인 000는, 할아버지 박하진이 마을에서 이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군단위에서 활동하던 인 물이었다고 한다. 어떤 활동이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좌익들의 주목을 받을만한 활 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 5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