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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보면 용산리 진막동, 윤얼태 희 생사건(마-3919(1), 1950.10.1.) 1950.10.1.(음력8.20)146) 해보면 용산리 소성마을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진막동 (陳莫同, 28)과 그 시동생 윤일태(尹一太I 25)가 좌익들에게 희생당했다. 신청인과 참고인에 의하면 진막동의 남편 윤일두는 경찰이었다.14끼 참고인 000은 당시 윤일두가 가족들이 위험할 거라고 하며 피신시키려던 참에 희 생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사건 당일 온 마을을 둘러쌀 정도로 지방폭도들이 총을 들 고 몰려왔는데 진막동과y 그 시동생 윤일태(윤일두의 동생)는 총이 아닌 칼로 머리를 맞아 희생당했다고 진술했다.148) 참고인 000은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시신수습도 했는데/ 진막동과 윤일태가 피를 많이 흘려서 그 피 냄새 때문에 버린내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고 하며y “윤석주 의 어머니(진막동)는 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2명이 아니라 3명이 죽은 것이나 마찬가 지“ 라고 진술했다.149) 이로 볼 때 진막동과 윤일태는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지방좌익들에 의해 희생당했 다고 판단된다. 2) 함평읍 기각리 함평다라 이민부 희생사건(마-7752, 1950.10.1.) 1950.10.1.(음력8.20) 학교면 사거리 명암마을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이민부(李民 夫, 30)가 좌익들에게 끌려가 함평다리 아래에서 총살당했다. 참고인 000은 이민부의 동생 이민봉이 함평에서 “청년단” 교육시키는 일을 했는 데,150) 그 때문에 좌익들이 여러 번 이민봉을 찾아와서 참고인의 동생이 이민봉을 숨겨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민부는 평소 좌익을 비판하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좌익 들한테 끌려가 함평읍 다리 아래서 총살당한 것이라고 진술했다.151) 146) 신청언 윤석주는 어머니의 사망신고가 1950.8.23로 되어 있고, 제사도 8.23 지낸다고 하였다. 하 지만 당시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시신수습을 한 참고인 000이 정확하게 날짜를 음력 8.20로 기 억하고 있었다. 신청인은 당시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여서 본 보고서에서는 참고인 000의 진술에 따르기로 한다. 147) 전남지방경찰청에 윤일두에 관해 조회를 의뢰했으나 관련기록이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진실화해 위원회 2009.8.5/회신 2009.8.17). 윤일두가 정식경찰이 아니라 의용경찰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 로 판단된다. 148)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5.27)J 149)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5.27)J 15이 신청인 조금순은 시동생 이민봉이 당시 현역군인이었다고 진술했다. 151)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6.30)J 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