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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산면 우치라 노대진 희생사건(마-1잃4, 1950.9.5.) 1950.9.5.(음력7.23) 나산면 초포리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노대진(盧大律y 여, 5끼 이 좌익들에 의해 나산면 우치리 접사리골로 끌려가 희생당했다.141) 노대진은 당시 집에 소 판 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좌익들이 몇 차례 찾아와서 돈 을 요구했으나 거절했다는 이유로 끌려갔다.142) 참고인들은 당시 소판 돈이 있다는 사실과 노대진의 아들이 경찰이었다는 사실 등이 당시 동네에 았던 좌익의 연락원을 통해 정보가 제공되었기 때문에 노대진이 끌려가 희생당했다고 한다 1싫) 이로 볼 때 노대진은 소판 돈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함께 아들이 경찰이었다 는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희생당한 것으로 판단된다.144) 노대진의 시신은 수소문 끝에 시기가 좀 지난 후 나산면 우치리 물방아등 접사리골 에서 발견되었으며y 시신은 집안사람들과 마을사람들이 수습했다.145) 다. 언민군 퇴각기 1950.9.28. 서울 수복 이후 전국 각지의 인민군은 퇴각하기 시작했고y 함평지역의 인 민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치안이 회복되기 전이어서 지방좌익의 활동은 지속되 었다. 주로 10월 초순에 희생사건이 많이 발생했는데y 대동면에서는 대동분주소에 감금 되어 있던 의용경찰 및 공무원/ 우익인사들이 희생당한 사건이 있었고/ 학교면에서는 함평이 수복된 줄 알고 태극기를 달았다가 그것을 보고 마을을 습격한 좌익들에 의해 희생당한 사건 등이 있었다. 141)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J 142) 진술에 따르기로 한다. 143)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J ; 참고인 000은 가해자들이 동네 출신 좌익으로 짐작된다고 하며 이름은 알아도 말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144) r전몰애국단체원대장」 에 노대진은 “나산면 口口지구 적소탕작전에 물품 보급 차 적의 불의기습으로 전사”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노대진의 경우 당시 소판 돈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직접적 인 희생원인으로 판단된다. 145) r신청인 이민행 진술조서 (2008.2.21)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4.28) J - 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