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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교회의 목사를 했고y 전쟁이 나자 이진희의 아버지는 피신을 해서 무사했다.109) 사건 당시 이진희는 조내마을의 김 00 이라는 사람 집에 숨어 았다가 소년단110)을 앞세운 분주소원들에 의해 끌려갔다.111) 참고인 000은 아버지 000 장로(산남교회)로부터 이진희가 끌려가는 모습을 직접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참고인 000은 “아버지도 남의 집에 피난 가 있었는 데 아버지는 다행히 다른 접으로 또 피선해서 무사했고 이진희 교장선생님이 묶여서 끌려 가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분주소원들이 죽창으로 밀고 때리면서 끌고 가는데 이진희 교장 선생님은 하늘만 쳐다보면서 가더라는 말을 하셨다”고 진술했다)12) 그 후 이진희는 손불간척지로 끌려가서 돌로 맞아 희생당했으며/ 당시 돌무더기 아래 에 이진희의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113) 참고언 000과 000은 “손불면 부면장을 하던 고영채114)가 8월에 희생당했고y 이진희 교장선생님은 그 전언 7월에 희생당했다”고 진술했다.115) 이진희의 시신은 이진희의 부인y 산남교회 전기동 장로를 비롯한 교회신도들이 수습 하여 산남리 농장마을에 묻었다.116) 4) 대동면 용정 리 김팔현 희 생사건(마-4942, 1950.8.1.) 1950.8.1(음력6.18) 대동면 용성리 정창마을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김팔현(金八 鉉, 40)이 좌익들에게 희생당했다. 사건 당일 좌익들이 마을에 몰려와서 마을 사람들을 정자에 모아놓고 돌아가며 “너는 뭐하는 사람이냐” 는 식으로 취조를 했다고 한다.11끼 109) í신청인 이춘하 진술조서 (2008.J ; í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6.29)J 11 이 참고인 000은 손불국민학교를 다녔던 제자가 소년단에 있었다고 한다(2009.6.29) 11 1) í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6.29)J 112) í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6.29) J 113) í신청인 000 진술조서 (2008.3.8)J ; í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6.29)J ; í참고인 000 진 술조서 (2009.6.29)J ; í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7. 1)J 114) 고영채가 당시 손불면 부면장을 했는지 여부 및 제적등본 유무 여부를 손불면사무소에 의뢰하였으나 관련기록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진실화해위원회 2009.9.2.협조공문/2009.9.4. 전화통지) 115) í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6.29)J ; í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6.29)J ; í피해연구보고 서」 에 고영채는, “고영채(납. 4이, 손불면 산남리, 부면장. 1950.10. 손불면분주소”에서 희생당했 다고 기재되어 있다. 희생시기가 참고인들의 진술과 차이가 나지만 본 결정서에서는 참고인들의 진 술에 따라 고영채의 희생시기는 8월, 이진희의 희생 시기는 7월로 한다. 116) í신청 인 이춘하 진술조서 (2008.3.8)J ; í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6.29)J ; í참고인 000 진 술조서 (2009.6.29)J 11 7) í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6.30)J - 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