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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신문의 기사와 참고인 000 의 진술이 대체로 일치한다. 하지만 신문기사에는 모성하와 그의 장남이 사망했다고 되어있는데y 제적등본을 보면 장남이 아니라 모성하 (후聖夏, 55)6이의 차남 모구원(후九源, 21)의 사망일시가 1949.8.2.로 되어 있는 등y 당시 사망한 사람은 모성하와 그의 차남 모구원으로 판단된다.61) 또 신문기사에는 모봉춘과 그의 장남이 희생당했다고 되어있지만y 참고언 모상문은 모봉춘(후封春, 56)62)의 차남 모평원(잭슨싹源, 21)이 사망했다고 했고y 모평원의 제적등본 상 희 생 일자가 1949.7.10.로 모봉춘과 같다. 이로 볼 때 신광면 삼덕리 덕천마을에서 이장 모종원의 어머니(성명불상), 모종원의 부인(성명불상)과 모종원의 아기(모00), 양금석/ 박삼자y 모성하와 그의 차남 모구원/ 모봉춘과 그의 차남 모평원 등 9명이 같은 날y 당시 마을을 습격한 무장폭도에 의해 희생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6) 나산면 초포리 이 백 태, 이 내 범 희 생사건(마-1530, 1445 / 1949.10.31.)63) 1949.10.31.(음력9.10.) 나산면 초포리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이백태(李伯泰, 48) 가 지방좌익들에 의해 같은 마을에 거주하던 이장 이내범(李乃範, 5이의 집으로 끌려가 서 희생당했다. 그 과정에서 진실규명대상자 이내범은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되었 고y 같은 날 미신청희생자 정여순 및 그의 아들들인 정헌칠과 정헌태 형제 등 3부자(父 子)도 같은 곳에서 희생당했다. 이내범의 딸 000은 이내범이 초포리 이장이었으며l 사건이 발생한 날 밖으로 나 가지 못해서 현장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마을사람들이 집 마당에 끌려와서 “다듬이 돌"64)로 맞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었고y 그 다음날 마을사람들이 마당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65) 59) 1"호남신문J 1949.8.9. <신광면서 또 양민 8명을 살해, 피해가족 폭도 섬멸코자 속속 경관지원〉 60) 모성하의 제적등본 상 한자이름은 “후聖夏”이다. 61) 제적등본 상 모성하의 사망일자는 1949.8.4.이고 모성하의 장남 모일원은 1924.10.25.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62) 모봉춘의 제적등본 상 한자이름은 “후封春”이다. 63) 이 사건은 신청인들이 정확한 사건 발생시기를 잘 몰라서 1950년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신청하였다. 하지만 신청인 이재필(마-1445)은 “호적에는 1951 년생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949년생이며, 내가 태어난 지 3주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진술했다. 제적등본 상 사망일이 이내범은 “1947.9.10", 이백태는 “1949.9.11 "로 되어 있고, 참고인 000은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전쟁 전 에 발생”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진술했다. 기타 호남신문 기사(1949.11.5.) 등을 종합해 볼 때 나산면 초포리에서 이백태, 이내범이 희생당한 것은 1949년이라고 판단된다. 64) 참고인들은 “다듬이독”이라 칭했다. - 5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