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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판중의 희생사실은 함평경찰서에서 희생당한 배석기 가족으로부터 전해 들었으며y 함평경찰서가 불에 타는 바람에 윤판중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닮) 이로 볼 때 1949.7.21. 윤판중의 집을 습격한 좌익들에 의해 윤판중의 아버지 윤도이I 장모 최두례l 처남 나복상r 처남댁(성명미상) 등 4명이 희생당했으며y 인민군 퇴각기인 1950.10.19. 윤판중이 함평경찰서에서 희생당하고,55) 그 비슷한 시기에 윤판중의 부인 나순임이 희생당했다고 판단된다.56) 5) 신광면 잠덕리 모정하 등 9명 희생사건(미신청희생사건, 1949.8.2) 1949.8.2. 신광면 삼덕리 덕천마을을 습격한 무장폭도들에 의해 이장 모종원(후鍾元) 의 어머니 등 같은 마을주민 9명이 몽둥이로 맞아서 희생당했다. 참고인 000은 1949. 음력 7월y “모성하 부자(父子), 모봉춘·모평원 부자(父子), 박 삼자,5끼 양금석y 이장의 어머니, 부인과 아기 1명” 등 같은 마을에 살던 사람 9명이 몽 둥이로 맞아서 희생당했다고 진술했다.58) 삼덕리 덕천마을에서의 희생사건은 다음 『호남신문』 의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신광면 덕천부락에 무장폭도가 침입하여 동 부락구장 후鍾元의 모(6이, 처 (3이, 그 리고 부락민 梁今石 (33), 후奉春(46)과 동인의 장남(22), 朴三者의 처 (4이, 후成夏 (55)와 동인의 장남(21) 등을 곤봉으로 무수히 구타한 후 일본도로 살해 ...... 금품 다수를 약탈한 후 ...... 불갑산 방면으로 도주 ...... "59) 53) 함평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사J . 1999. 68쪽. 54) r신청인 윤경중 진술조서 (2008.2.18)J 55) 11"6.25사변피살자명부』 에 의하면 윤판중은 “尹判童, 남. 33. 12.12. 함평내무서”에서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윤판중의 이름이 “尹判童”으로 되어 있으나 尹判重의 오기인 것으로 판단된다. 56) r피해연구보고서」 에 나순임은, “윤판중의 처, 농업. 1950. 6.25전”에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한국전쟁 전에 희생당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참고인들의 진술에 따라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10. 경에 희생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57) 참고인 000은 ‘박삼자’가 희생당했다고 진술했으나, 『호남신문』 에는 ‘박삼자의 처’가 희생당했다 고 되어 있다. 박삼자의 후손이 없어 구체적으로 누가 사망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본 결정서에서 는 당시 마을에 거주하고 지금도 거주하고 있는 참고인 000의 진술에 따라 ‘박삼자’가 희생당한 것으로 판단했다. 58) r참고인 000 진술조서(2009.4.8)J ; 신광면 삼덕리에서의 희생사건은 참고인 000이 ‘신광면 복흥리 심기택 희생사건(마-503이’관련하여 진술하는 과정에서 인지된 사건이며 .000의 진술과 『호남신문』 의 기사내용이 동일하여 조사결과에 반영시켰다. 하지만 모종원, 박삼자, 모봉춘, 모성하 등은 후손이 없어서 추가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그리고 신광면사무소에 의뢰, 모봉춘, 모성하의 제 적등본은 입수하여 가족관계 둥을 파악했으나 모종원, 박삼자의 제적등본은 입수할 수가 없었다. (진 실화해위원회 2009.8.24/ 회신 2009.8.25) - 5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