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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판중의 장모 최두례(崔豆禮, 4η/ 윤판중의 처남 나복상(羅福相, 19), 처남댁(성명y 나 이불상)이 상옥리 옥동마을에서 희생당했다.46) 다음 『호남선문』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학교면 상옥리 옥동부락47)에 20여명의 무장폭도가 尹判重씨 댁에 침입하여 동 가족 4명을 곤봉으로 무수히 구타 살해하였다는데 그 집주인 尹씨는 그들이 부락민 집합 차 나간 틈에 중상의 몸을 일으키어 도주하여 륭변을 모면하였다 한다"48) 참고인 000는 당시 국민학생이었는데 학교 가는 길에 거적에 싸놓은 윤판중의 아 버지 등 희생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보았으며,49) 상옥리 옥동마을의 고령자들은 대개 윤판중 가족의 희생사실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50) 윤판중의 부인 나순임은 그때 총상을 입었으나 살아났다가y 한국전쟁 발발 후 좌익 들에 의해 옥동마을 앞 뱃가로 끌려가서 희생당했고 시신은 집안사람들이 수습했다.51) 한편y 윤판중도 당시에는 무사히 빠져나가 피난을 갔다가 1950. 음력 8월 경 함평에 들어왔는데, 다시 좌익들에게 잡혀 함평경찰서(당시 내무서. 이하 함평경찰서)로 끌려 갔다. 그 후 인민군 퇴각기에 좌익들이 함평경찰서에 불을 질렀고I 그 때 윤판중과 같 이 감금되어 있던 배석기(경찰)가 희생당했다.52) 좌익들이 함평경찰서에 불을 지른 것 은 1950.10.19.이 다.53) 2009.8.1 7). 보훈처 자료에 윤판중의 소속이 “애국단원” 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윤판중은 당 시 ‘대한청년단원’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신청인과 참고인들은 윤판중의 활동내용에 대해서는 모르 고 있었고 “경찰에 협조적”이고 “경찰과 친했고” “좌익의 미움을 많이 받았다”는 이유로 희생당했다 고 진술했다. 46) r신청인 윤경중 진술조서 (2008.2.18)J ;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2.26)J ; r참고인 000 진 술조서 (2009.2.25)J 47) 상옥리는 당시 행정구역 상 학교면에 속했다. 1914. 행정구역 개편 때 목포부 금동면에서 함평군 학교면에 편입. 1973.7.1. 함평군 대동면에 편입되었다. 본 결정서에서는 현재 행정구역인 ‘대동면 상옥리’로 표기하기로 한다. 48) 11'호남신문JI • 1949.7.24 <발악하는 폭도 하룻밤새 6개면 출현〉 49) r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2.25)J 50) 상옥리 옥동마을회관에 있던 고령자들 대부분은 윤판중 가족의 희생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 다.(2009.2.25) 51) 윤판중의 처남 000은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누나(나순임)가 매형(윤판중) 보다 먼저 희생당했 다고 했다. (2009.2.26). 하지만 신청인 윤경중은 좌익들이 함평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난 후 옥동마 을로 다시 들어오} 형수(나순임)를 칼로 찌른 후 뱃가에 밀어 넣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형과 형수 의 희생날짜를 정확히 몰라서 제사는 음력 5.5에 합동으로 지낸다고 하였다. (2009.8.11.전화면담) . 따라서 윤판중의 희생날짜는 함평경찰서가 불탄 1950. 10.19.로 추정되며, 그의 부인 나순임은 그 비 슷한 시기에 희생당했다고 판단된다. 52) 전남경찰청에서 보유하고 있는 인사기록에 의하면, 배석기(裵碩基. 1923년생)는 함평소속 순경이었 으며 1950.10. 순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9.8.5/회신 2009.8.13) - 5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