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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현지조사 총 6차례의 현지조사를 통해 신청인 및 참고인을 면담하였고/ 사건 발생현장을 확인 하였으며y 사건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제1차 현지조사는 2009.2.23 - 2.27.에 함평군 대동면에서y 제2차 현지조사는 2009.3.1 6-3.20.에 손불변에서y 제3차 현지조사는 2009.4.6-4.10에 신광면에서y 제4차 현지조사 는 4.1-5.1 나산면에서/ 제5차 현지조사는 2009.5.25-5.29.에 나산면/ 해보면에서, 제6 차 현지조사는 2009.6.29. -7.3에 함평군 일대에서 실시하였다. II. 조사결과 1. 사건배경 함평지역은 해방정국 및 한국전쟁기의 정치적 성향으로 볼 때 우익성향이 강하고y 해방정국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좌우대립이 그렇게 심하게 표출되지 않았던 곳이었다. 해방직후 결성된 함평 I건국준비위원회'(8.16결성)의 위원장에 일본대학을 졸업하고 일 제강점기 하에서 관료로 근무한 경력이 있던 이재혁이 추대된 것만 봐도 알 수 있 다.19) 하지만 함평지역은 함평지역 내의 정치적인 성향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y 불갑산이나 군유산 등 산악지역이 있어서 나주나 목포 등지에서 활동하던 좌 익 활동가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이곳에 들어와 그들의 주도하에 강력한 정치적 행 동이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이다.2이 1948년 '2 . 7구국투쟁/ 및 '5 . 10선거 반대투쟁, ,여순사건y 등을 거치면서 좌익단체 • 활동가들은 무장투쟁 및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함평지역 역시 무장세력(빨치산)과 군경과의 충돌이 이어졌다.21) 함평지역에서는 “좌우익의 대립이 폭력적인 형태로 변해가던 1948년도부터 희생사건이 19) 안종철, 『광주·전남 지방현대사 연구J • 한울아차데미. 1991. 1 05-1 06쪽; 이재혁은 일본대학 법률과 를 졸업하고 총독부 관리, 도 평의원을 지낸 경력이 있으며 1 천여 두락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였다. 20) 함평군, 「함평군한국전쟁기간민간인희생자피해연구보고서 J • 2006. 27-28쪽. 21) r호남신문.!I 1949.7.5. <폭도 뻐쓰를 습격 이소위 응전 끝에 전사> ; r호남신문J 1 949.7 . 1 o. <함평 에 폭도>; r호남신문J 1949.7.24. <발악하는 폭도 하룻밤새 6개면 출현> ; r호남신문J 1949.8.6. 〈일가문 9명을 살해 손불면 지호부락서 폭도만행> ; r호남신문J 1949.8.10. <신문기자 등 살해 나 산면서 무장폭도양민에 만행〉 등. - 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