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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Z쪼전 안군실 얀석수 남 1931 。 0 확언 83 1α318 박용재 박상} 남 1910 。 × 환ε못k애l 찾 깃셀음나 확언 84 미신청 김을성 김갑성 남 1924 。 0 획언 85 미신청 키l그오-,니 p 이재식 남 1931 。 0 확언 엄다면 86 미신청 박규석 박남석 남 1930 0 0 확언 신청인과 참고인들은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1948년과 1919년 사이 불갑산과 군유잔 일대의 입산X뚫에게 식량을 제공하거나 그들의 짐을 날라 주는 식의 도움을 준 후 경찰에 자수하거 나 체포되었다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함평군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중 직업과 나이 등이 파악된 π명을 보면 함평군에서 농 업(W%)에 종사하던 20~30대(82%)가 대부분으로 모두 남성(100%)이었다. 나} 희생자수 관내 지서/ 함평경찰서/ 목포형무소를 거쳐 목포시 인근 바때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진실 화해위원회 조사결과 외에 희생자 수를 추정할 만한 별다른 자료 등이 없다. 신청인과 참고인 의 진술을 토대로 목포시 인근 바디에서 희생된 사람들 중 성명이 확언된 사람은 30명이다. 학교면 얼음재에서 희생된 사람 역시 관내지서를 거쳐 함평여중에 구금 후 희생되었는데 그곳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다는 신청인의 진술 외에 희생자 수를 추정할 별다른 자료는 없다. 조사결과 얼음재 희생자 중 성명이 확언된 사람은 3명이다. 신청연과 참고인의 진술을 토대로 나산면 넙태 희생자 중 성명이 확언된 사람은 95명이다 그러나 함평여중 강똥써 구금되었다가 넙태로 끌려가서 총상을 입고 살아 온 노기현의 진 술과 또 다른 넙태 생존자 정만우가 아들에게 해준 전언으로 보아 일부 생환자를 제외하면 희생지는 200명 내외로 추정된다. 38) 사건 신청인이 사멍하여 조사를 할 수 없었고 침고언을 찾을 수 없었다. 39) 사건 신청인이 뚜렷한 이유 없이 조사를 거부하여 조사를 할 수 없었고7 침코인을 찾을 수 없었다. 40) 사건 신청인이 사%녕}여 조사를 할 수 없었고 참고인을 찾을 수 없었다‘ - 4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