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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면 김회쟁 2ím.3.11. 참고인 (21서0 자택 다. 조사결과 U 사건배경 • 윌야면 국먼보도연맹완은 총 186명으로 위원장은 안금주의 장형(월야면 계림리 시목-o}을/ 넙태에서 희생. 안병호로 추정 댐이었고 총무는 내가 맡았는데 평 소 총무가 소집 연락 등을 담당하였기에 월얘견 보도연맹원 수를 이는 것임. 즈-g-1으 p • 한국전쟁 벌발 전 까지 약 m여회 정도 월야2써에서 보도연맹완을 소집하여 /반란군을 돕지 말고 그맑 때니면 신고해r는 등의 교육을 시킴. • 월야펀 보도연맹원 총 186명 중에는 소죄에 응한 시렴도 았고 피해버린 사람 도 있어서 총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는 일치 못힘. 다만 윌야편 보도연맹원 중 넙태에서 살아 돌아 옹 사림:은 이석동 강천삭 이동촌 등3명임.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i함평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군정이 시작된 얼마 후 i함평언민 위원회r로 개편되었다. 미군정이 실시되어 1946년 3월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보안서징어 교체 되었다. 이에 대해 인민위원회와 함평 농민조랍 청년동맹 등은 미군정에 대항하였으나 역부 족이었다. 1948년 m윌 여순사건 후 일련의 무장부대가 함평군에 왔고 여기에 함평군 주민 일부가 합 세하여 불갑산 군유산 등지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군경토벌대가 불갑산과 군유산 토벌 작 전을 하면서 이 산 근처의 손불 · 신광 · 대동 · 해보 · 윌야 · 나산면 주민들은 빔에는 야산대에 게 낮에는 토벌대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상황-01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민 중 일부가 야산대에게 식사와 식량을 제공한 후 경찰에 적발되거나 자수 하여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들의 보도연맹 가입 경위를 보면 A동조하여 함께 활동1전선절단 사건 등J 6빨치산을 따라{혹은 강제적으로) 입산 후 하산 A식사 및 식량 제공 A토벌대에 관한 제봐토벌대가 마을에 오면 봉회를 올려 빨치산에게 알림) 6빨치산 은거에 도립마을에 비밀 아지트를 마련하여 은거시킴)을 주는 등의 활동을 한 후 i지수하면 용서해준 다는 경찰의 권유로 지수와 함께 국민보도연맹에 가입 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22) 야산대는 1949년 겨울 국군 20연대의 토벌로 대부분 활동력을 잃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23일 굉주광역시가 인민군에 점령되었고 같은 날 함평경찰은 후퇴 길에 올랐으나 전남 동부지역이 인민군에 의해 차단되어 완도군 일대로 후퇴하여 활동하다가 부산으로 후퇴 하였다 22) 신청인 이계행 등 진술조서(2cm.210.) - 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