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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군인들이 금방 산에서 내려오느라 땀을 흘린 것이라고 하고는 바로 총을 쏘았다 고 합니다. 당시 박성인의 큰누나 즉 내 큰처형도 현장에 있었는데 군인들이 무서 워서 감히 나서서 뭐라고 얘기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군인들이 돌 아가고 나서 큰처형이 박성인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들었습니다."553) 신청인 박기섭은 “모친과 막내숙부를 통해 당시 총탄이 숙부의 목을 뚫고 나갔고I 묘도 제대로 쓰지 않은 채 평장을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현재도 직접 그 묘를 관리하 고 았다”고 진술하였다.554) 신청인과 참고인 모두 정확한 사건 발생일자는 기억하지 못하였으나 현장 목격자를 통해 사건을 전해들은 참고인 정경춘의 진술에 근거하면,555) 박성인(당시 31세)은 1950 년 12월 말경 문장에 주둔했던 국군 제20연대 2대대 5중대에게 살해된 것으로 판단된 다. 바) 해보면 상독리 모평마을 사건 (1) 사건 개요 0사건 번호: 다-1244호 외 2건55이 0사건 개요: 1951년 1월 12일 국군 제20연대 2대대 5중대는 해보면 쌍구룡에서 해 보변 상콕리 모평마을 주민 정영환 외 7명을 다른 주민들과 함께 사살하였다. (2) 사건 내용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사건 또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2007년 상반기에 「함평 11 사단 사건J 55끼으로 진실 규명된 사건이나/ 신청인 윤양성(다-1244)은 언어장애로y 그리 고 윤금복(다-1245)과 채상현(다-3631)은 연락 두절로 인해 진술을 청취할 수 없었고 그 래서 「함평 11사단 사건」 의 진실규명결정서에 누락되었다.558) 동 진실규명결정서에 553) 참고인 정경춘 통화보고서(2009.1.29.) 554) 신청 인 박기섭 진술조서(2008.820.) 55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해가 바뀌지 않았으며/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사건(1951년 1월 12일)이 발생하기 전에 사망했다는 걸로 들었다." (참고인 정경춘 통화보고서 2009.1.29) 556) 사건변호는 다-1244, 1245, 3631호 등 3건이다. 55꺼 진실화해위원회, r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J, r함평 11사단 사건J , 2007, 467~닮6쪽. - 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