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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둔했던 국군 제20연대 3대대 본부중대가 자행한 사건으로 추정된다.501) 신청 인과 참고인들은 당일 마을에서 모두 12명 이 사망하였다고 진술하였으나y 신원 이 확인된 사람은 강삼수(당시 19세)와 강재수(당시 26세) 뿐이었다.50깅 라. 영광 · 함평군 사건 영광 • 함평지역 11사단 사건의 진실규명 신청건수는 16건503)이나 신청인 정병주(다 -1116호)와 정태중(다-1117호)은 진술거부의사를 밝혔다. 영광군 지역은 1950년 10월 30일 국군 제20연대 2대대와 3대대가 수복작전을 벌였 으나 영광에서 1박 이후 바로 이동하였고y5따) 영광지역의 경비는 경찰이 담당하게 되었 다. 그 후 영광지역에는 국군 제20연대 2대대 6중대가 1950년 11월부터 12월 10일까지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505) 함평지역은 1950년 10월 22일 역시 국군 제20연대 3대대가 수복작전을 실시하였 고켜06) 3대대가 10월 30일 영광지역으로 이동한 후에는 11월 중순부터 1951년 1월 중순 까지 함평군 해보면에 국군 제20연대 2대대 5중대가 주둔하며 장성군 삼서면과 영광군 묘량면 그리고 함평군 일대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하였으며y5O끼 1951년 2월 20일에 는 국군 제20연대 2대대가 불갑산 지역 빨치산에 대한 대규모 소탕작전을 벌였다Ii한 국전쟁사료.!I 59권에는 국군 제20연대의 영광 · 함평 지역 작전기록 3건이 언급되어 있 다. 501) 당시 학도병으로 3대대와 함께 화순읍에서 근무했던 참고인 박성규는" "3대대 본부중대가 화순읍 광덕리 남산 에 주둔했고/ 중대장은 임모 중위였다”고 진술하였다.(참고인 박성규 통화보고서 2때8.9.10.) 502) "삼촌 강재수y 강삼수를 포함한 청장년 12명이 총살되었다고 들었다." (신청인 강정실 진술조서 2008.7.22); “마 을 사람으로는 강재수y 강삼수 외에 한영교씨 장남I 황기태y 황경현/ 김상만/ 오판동 등이 죽었고/ 나머지는 타지 사람이었다." (참고인 정병래 통화보고서 2008.9.29); “마을의 청년 9명 정도를 골라내어 총살한 걸로 기억한다" (참고인 박태순 통화보고서 2008.10.23.) 503) 총 신청건수 16건 중 영광지역 사건이 4건이고/ 나머지 12건은 함평지역 사건이다. 504) 당시 3대대장이었던 김필상의 진술에 따르면, 3대대는 함평 수복 이후에 2대대와 함께 영광을 수복하고 1박 후 바로 고창으로 이동하였다.(참고인 김필상 통화보고서 2008.1.31); 또 『한국전쟁사료.J 59권에는 3대대의 영광 수복작전이 1950년 10월 30일에 수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 59, 198κ 927. 938쪽.) 50되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I 59권에는 원래 고창에 았던 국군11사단 13연대가 20연대와 주둔지를 교체하는 시 기를 1950년 12월 10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육군본부y 『한국전쟁사료.! 59, 198κ 608쪽), 6중대 사병이었던 참고인 양창규는 "장성을 수복하고 얼마 안 있다가 영광으로 가 주둔하였고 다시 고창으로 갔다”고 진술하여(참 고인 양창규 진술녹취록 2007.12.12), 6중대가 영광에 주둔했던 기간은 영광이 수복된 10월 30일 이후부터 고창 으로 이동한 12월 10일 사이로 추정되는데/ 구체적인 영광 주둔 일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506) 진실화해위원회, 1"2008년 상반기 초사보고서J 2, r함평 수복작전 민간인 희생 사건J , 2008, 89~141쪽. 507) 진실화해위원회, 1"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Jl, í함평 11사단 사건J , 2007, 467~닮 6쪽. - 3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