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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돌아오} 들었는데 저희 가족이 피난을 간 후에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남아았던 몇몇 주민들을 삼서지서로 데려갔다고 하더군요 11라고 진술하였다}28) 회성마을도 원촌마을과 마찬가지로 1951년 1월 말까지는 군경이 진주하지 못하다가y 빨치산이 노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을 데리고 불갑산으로 퇴각한 후329) 군인들이 진주하여 마을을 소각하였다}30) 1월 말 삼서면의 빨치산이 불갑산으로 퇴각할 때/ 수련산을 중심으로 한 삼계면과 황룡면/ 서삼면 등지의 빨치산 역시 주민들을 데리고 순창군으로 퇴각하였고,331) 2대대 는 2월 초부터 순창군에서 빨치산 토별작전을 벌였다,332) 순창에서의 토벌작전을 끝낸 2대대는 2월 20일 불갑산 토벌작전333)을 위해 장성읍을 지나 함평군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951년 2월 18일 학성리 회성마을을 경유 하며r 마을이 소각되고 소개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있던 주민 서윤 기(당시 64세)와 서남기(당시 59세)를 함평군 월야면 월계리와 접해있는 삼서면 대도리 관동마을로 끌고 가 관동마을 주민 1명과 함께 마을 앞 논에서 살해하였다. 당시 상황 을 신청인 서익수(당시 9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11회성마을 주민들이 불갑산으로 갈 때 조부(서윤기)와 종조부(서남기), 그리고 조 부의 장모님(양여용)께서는 연로하셔서 집에 계셨습니다. 근데 사건 당일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오l- '왜 피난을 가지 않았느냐r고 묻자 조부께서는 /식구가 많아 모두 피 난을 갈 수 없어 안 갔다/고 대답했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조부와 종조부를 데리 고 삼서면 대도리 관동마을로 가서 그 곳 주민 한 명을 끌어내어 세 분을 함께 마 을 논에서 총살했다고 하더군요."334) 2대대의 이동루트와 관련하여 2대대 6중대 사병이었던 참고인 양창규는 “회문산 작 328) 신청 인 김재수 진술조서(2008.7.10.) 329) 불갑산지역 민간인희생사건의 신청인 박기홍은 “당시 회성마을은 20호 정도 되었는데,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갔습니다. 학성리1구가 원촌y 희성이고 학성리2구는 좌동/ 학동/ 내봉마을 등이었는데 학성리1구는 대부 분 피난을 갔었고, 2구는 일부만 갔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신청인 박기홍 진술조서 2008.9.2.) 330) “원촌마을에 불을 지를 무렵 회성마을에도 불을 질렀습니다." (참고인 나정자 진술조서 2008.7.10.) 331) 서삼면 엄곡리 주민들은 당시 엄곡리 주민 대부분이 빨치산을 따라 순창군으로 피신했었다고 진술하였다(신청 인 김 영태 진술조서 2008.7.9; 신청 인 김영석 진술조서 2008.7.와 신청 인 김옥수 진술조서 2008.7.9.) 332) 주 ]205 참조 333) 불갑산 토벌작전은 1951년 2월 20일(음력 1월 15일)에 2대대의 5.6.7.8중대와 연대직할 중대가 수행하였 다.(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J 59, 198κ 1106 .1112쪽.) 334) “피해사실을 불갑산에서 돌아온 후 조부의 장모님께 직접 듣고l 당숙 서봉길과 함께 관동마을에 가서 시신을 수습해 왔다. 당시 함께 살해된 관동마을 사람은 최상식씨의 숙부였는데I 최상식씨는 이미 30년 전에 사망하였고 다른 유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신청 인 서 익수 진술조서 2008.9.2.) - 3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