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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이 불갑산으로 도주하기 전까지는 군인들도 빨치산의 저항 때문에 학성리 내 부까지 들어오지는 못하였다.325) 그러나 빨치산이 퇴각한 후인 1월 30일 학성리에서 작 전을 수행한 군인들은 빨치산의 저항이 없자 마을 안까지 진주하여 마을을 소각하고 인근 산으로 피신했던 주민들을 찾아내어 사살하였다. 그 과정에 주민 문석암(당시 53 세)도 손녀 문복순(당시 4세)을 업고 산으로 피했다가 군인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신청인 문만섭(당시 19세)은 당시 불갑산에 있어 현장을 목격하지는 못했으나r 며칠 후 식량을 가지러 원촌마을에 돌아왔다가 모친을 통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시의 상 황에 대해 신청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마을에 돌아와 보니 집들이 전부 불타고 어머니와 막내숙모가 함께 마을 앞에 앉아 있어 사정을 불어보니y 어머니께서 우리가 불갑산으로 간 다음날 군인들이 마 을에 와 다들 산으로 피했는데 저녁에 산에서 내려와 보니 막내숙부(문석암)의 아 들이 막내숙부와 자기 딸(문복순)의 시신을 옮겨다가 마을 앞밭에 묻었다고 말씀하 셨어요."326) 당시 원촌마을에 거주했던 박봉옥(당시 17세) 역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 하였다. “빨치산이 주민들을 끌고 불갑산으로 빠지고 나니까 군인들이 마을까지 들어올 수 있었나 봐요. 그때 나도 불갑산에 끌려가서 직접 목격하진 못 했지만 며칠 후에 마을에 가보니까 집들이 모두 다 타버리고 없더군요. 우리 부모님은 그때 불갑산에 가지 않았었는데 군인들이 마을에 불을 내니까 살 수가 없어 결국 삼서면 대독리로 피난 나가 사셨어요. 내가 직접 목격한 건 아니지만 문석암씨도 아마 군인들이 불 을 지를 때 돌아가셨던 것 같아요."32끼 또 당시 원촌마을에 거주했던 김재수(당시 12세)도 “저희들이 피난을 갈 때까지는 경찰이나 군인이 들어오지 못하였으니 수복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불갑산에 을 그대로 두고 가면 자기들 간 곳을 가르쳐준다고 하여 노인들만 빼놓고 나머지 주민들을 인질로 삼아 불갑산 으로 데려갔습니다." (신청인 문만섭 진술조서 2008.8.19.) 325) “당시 우리 마을과 인근의 태청산에는 영광의 막퉁이부대/ 무안부대/ 장성8중대 등 빨치산이 많았기 때문에 국 군은 마을까지 들어오지도 못하고 항상 대도리 앞산까지만 올라와 몇 번씩 총만 쏘다가 석양이면 돌아가고 그랬 어요." (참고언 박봉옥 통화보고서 2009.1.3.) 326) "당시 피살현장에는 두 사람 이외에 다른 마을 사람 한 명도 같이 죽어있었다더군요." (신청인 문만섭 통화보 고서 2009.1.3.) 32끼 참고인 박봉옥 통화보고서(2때9.1.3.) - 3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