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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상태에서 빨치산에 대한 협력 여부를 묻고는 각 줄 앞에 군인들이 한 명씩 서서 한 줄씩 차례로 사격을 하였는데/ 그 와중에 나와 김요상 l 박성근y 홍순희, 양분례r 김정애y 새난양반 신씨 등은 살아남았다."318) 당시 국군은 확인사살까지 하였다. 이에 대해 또 다른 현장 생존자인 김요상은 다음 과 같이 진술하였다. 11한차례 사격 이후에 군인들이 t살아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라 I 살려주겠다,고 하니까 여자 2명이 일어났고 군인들은 바로 그 2명을 쏘아 죽였어요. 그리고 나서 도 세 번이나 더 /살아있는 사람 았으면 나오라r고 했어요. 또 군인들은 죽은 사람 들을 발로 차서 사망여부를 확인했는데/ 여자 한 분은 배에 나뭇가지가 있어 군인 들이 폼을 밟으니까 t어매야r하고 소리를 내어 다시 총을 맞았지요."319) 신청인 이균상(당시 9세)은 “가족 중 부친과 모친 그리고 누나와 4살 남동생이 산으 로 끌려갔고/ 본인과 바로 아래 동생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과 함께 따로 마을 아래 쪽 금호리 다리 밑으로 끌려갔는데r 나중에 부친은 살아서 돌아오셨다”고 진술하였 고,320) 참고인 박병원은 “산에서 군인들이 첫 번째 줄의 주민들을 살해할 때 이균상씨 부친이 /내 아들도 군대에 가 있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마구 사람을 죽여도 되느냐I고 항의하자 군인들이 따로 나오게 하고는 /당신 부인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I저기서 총 맞아 죽었다/고 대답하자 J그 얘기를 왜 이제야 하느냐’고 하면서 그 분만 살려 줬 다고 하더군요"라고 진술하였다.321) 이상 신청인과 참고인들의 진술에 근거하면/ 장성에 주둔했던 국군 제20연대 2대대 는 수련산의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동료가 전사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51년 1월 27 일 수련산 자락의 황룡면 통안리 주민 80여 명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그러나 신청인과 318)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나이가 다양했습니다. 한 오십에서부터 열 살까지 그랬 던 것 같아요." (참고인 박노준 진술조서 2008.3.끼; “당일 제 이모 댁에서도 5명이 올라갔는데f 그 딸(양홍순/ 양분 례) 툴은 살아 내려왔어요." (신청인 이균상 진술조서 2008.3.7.) 319) "그때 나는 느낌이 이상하여 뒷줄로 옮기는데 군인이 저에게 와서 개머리판으로 쳐 무릎을 구부린 채로 엉거 주춤하게 었다가 바로 총소리와 함께 넘어졌는데 앞사람과 옆 사람의 피와 살점들이 저의 온옴에 흥건하게 묻어 군인들이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참고인 김요상 진술조서 2008.3.7.) 320) 신청인 이균상과 참고인 김요상은 사건 이후에 주민들을 통해y 군인들이 당시 금호리 다리 밑으로 끌고 간 주 민들도 죽이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는 연락을 받고 모두 필암마을까지 데리고 가서 임시로 살게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신청인 이균상 진술조서 2008.3.7; 참고인 김요상 진술조서 2008.3.7.) 321) 참고인 박원병 진술녹취록(2때8.9.23);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부역혐의를 물을 때 부친만 혐의를 인정하자l 그 대장이 부친을 따로 나오게 하여 이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살려준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신청인 이균상 진술조서 2008.3.7.) - 3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