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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간 곳으로y 이 지역에 대한 2대대의 토벌작전은 1950년 10월 말부터 시작되어 1월 말까지 이어졌고I 결국 수련산 일대의 빨치산 다수가 순창군 쌍치면과 복흥면 그리고 회문산 일대로 퇴각하게 되었는데, 2대대는 그 빨치산을 쫓아 2월 초부터 순창 및 정 읍 지역에서도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참고인 이상용(당시 14세)과 박원병(당시 14세)의 진술에 따르면y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 국군의 수련산 일대 토벌작전이 있었는데 당시 군인 몇 명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31에 이와 관련하여 『한국전쟁사료j] 59권에는 “장성군 동화면 일대 소탕 전”의 전투상황도가 있다. 이에 따르면 작전일자는 1951년 1월 24일이고 5.6.8중대 가 담당했는데y 제목과는 달리 주요 전투지역은 수련산과 와우리 및 통안리였고/ 당일 작전으로 빨치산은 모두 188명이 사살되었으며 국군은 6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기록되 어 있다.315) 국군은 수련산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그 전에 이미 통안리 마을을 소각하고 주 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린 상태였다. 목격자 김요상(당시 14세)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 이 진술하였다. “1951년 1월 상순경 군인들이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르고 다른 마을로 피난을 가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 전부가 한 20리길에 있는 필암마을로 피난을 가려 했는데 지방좌익들이 피난을 가지 못하도록 봇짐도 뺏고 폭행하여 주민들은 피난가지 못하고 불에 타다 남은 4채의 집에 모여 생활하고 있었습니다."316) 일부 전우가 전사한 뒤 1951년 1월 27일 2대대는 다시 통안리로 와서 마을을 떠나 지 못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보복살인을 자행하였다. 군인들은 청방 등과 함께 마을에 진입하여 거동할 수 있는 주민은 모두 산으로 끌고 올라갔다 31끼 산으로 끌려간 주민들은 모두 80여 명이었는데y 현장 생존자인 박노준(당시 19세)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11군인들과 청방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저희 마을주민 약 80여 명을 한갓등이라 는 산으로 끌고 갔다. 산에 올라가자 군인들이 주민들을 산중턱에 세 줄로 앉혀 놓 314) 참고인 이상용 진술녹취록(2008.9.23); 참고인 박원병 진술녹취록(2008.9.23.) 315)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8 59, 1987, 949쪽. 316) 참고인 김요상 진술조서(2008.3.7.) 31끼 참고인 박노준 진술조서(2008.3.7.) - 3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