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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리 주민 정정근(당시 22세)도 “당시 고향마을에 거주하지 못하고 장성군 삼서면 이나 함평군 해보면/ 나산면 등지로 피난을 나갔다가 식량을 구하려 고향마을에도 다 니면서 살았는데/ 피신을 다니다가 돌아오니 고향 사람들이 정악휴의 사망 사실과 시 신을 찾아와 고향에 매장했다는 얘기를 해 주어 알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306) 당시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에는 국군 제20연대 2대대의 1개 중대가 주둔하였고y3O끼 비슷한 시기에 국군 제20연대 2대대 5중대는 함평군 해보면 금덕리에 주둔하여 인근지 역의 빨치산 토벌과 주민소개 작전을 벌였다}08) 삼서면 대곡리는 삼계면에 주둔했던 중대와 해보면에 주둔했던 중대의 작전반경에 있는데/ 당시 삼계면 주둔 군인들은 12월 초순 주로 삼계면과 수련산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삼서면은 해보변에 주둔하던 5중대가 담당했다. 12월 초순 5중대의 주요 작 전지역은 함평군 월야면 및 월야면에 접해있는 장성군 삼서면/ 영광군 묘량면 등지였 다. 5중대는 구체적으로 12월 6일 윌야면 정산리의 장교 · 동촌 · 서촌과 삼서면 수해리 에서, 12월 7일에는 월야면 월야리와 월악리에서, 12월 9일에는 월야면 외치리에서 빨 치산토벌을 명목으로 가옥소각과 주민소개 작전을 펼치며 민간인 집단학살을 자행하였 고,309) 또 12월 12일에는 월야면 서쪽의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에서도 작전을 수행했 다}10) 그러나 12월 중순이후부터 5중대의 작전지역은 월야면 남쪽의 해보면과 나산면으로 이동하였다}11) 즉 5중대는 1950년 12월 초순 집중적으로 함평군 월야면과 인근 장성군 306) 참고인 정정근 통화보고서(2008.10.23.) 307) 삼계면 주산리 월산마을 주민 송옥순은 “10월 31일 삼계면 수옥리에서 군인들을 처음 보았고/ 약 일주일 후에 사창리에 군인들이 진주했다”고 진술하였고(참고인 송옥순 진술조서 2008.7.9), 삼계면 수옥리 주민 김원근도 “10 월 31일 군인들이 마을에 왔다가 며칠 후에 다시 와서 마을을 소각하고 사창리로 소개명령을 내렸다”고 진술했 으며(참고인 김원근 진술조서 2008,7.키/ 당시 사창리에서 학도연맹원으로 활동했던 000는 “경찰지서가 삼계면 주산리 월산마을 뒷산 고지에 들어왔고 사창리 우봉마을에 군인이 주둔하였다”고 진술하였다,(참고인 。 00 진 술조서 2008.11.3.) 또 당시 2대대에서 복무했던 사병들은 /삼계면’이라는 지명은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삼계면소 재지인 i사창리Y와 수련산에 대해서는 I한참동안 주둔하며f 작전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참고인 황학준 진술 조서 2006.7.6; 참고인 박병인 진술녹취록 2007.2.14; 참고인 양창규 진술조서 2007.12.12.) 308) 진실화해위원회에서 2007년 7월 3일 진실규명 결정된 「함평 11사단 사건」 의 관련 기록에 따르면, 5중대는 1950년 11월 27일 이미 윌야면 외치리에 경비초소를 설치하였고, 12월 2일에는 함평군 해보면 정산리 동촌마을 한새들에서 빨치산과 전투를 벌였다.(진실화해위원회, 1'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J, r함평 11사단 사건J , 200κ 487-489쪽.) 309) 진실화해위원회, 11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J, r함평 11사단 사건J , 2007, 489-496쪽; 김영택y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J , 도서출판 사회문화원, 2001, 90-116쪽; 또 삼서변 수해리와 접해있는 함평군 해보면 예덕리는 12월 8일 5중대가 와서 소개령을 내렸다.(신청인 안정애 진술조서 2007.9끄.) 310) “사촌형 양윤옥은 윌야면 용정리 복룡에 살다가 5중대를 피해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로 피했는데, 5중대가 연 암리까지 와서 12월 12일 주민들과 함께 총살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신청인 양윤식 진술조서 2007.9.12.) - 3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