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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한 민간인 희생사실을 인지하는 진술을 하였다.20η 당시 월야/ 해보/ 나산면 등 함평군 일대에서는 국군의 토벌작전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자 이를 피하기 위하여 불갑산에 들어온 주민과 빨치 산과 함께 전 가족이 불갑산에 피난을 온 장성지역 주민 등이 용천사 주변 에 움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었다. 작전 후 대대장이 연대장에게 보고한 「전투상보」 를 보면 국군은 전사 3 명l 부상 24명인데 사살한 적은 1,005명으로 기록되어 았다.208) 그러나 당시 작전 관련 군 기록에는 적의 규모를 350명으로 기록하고 있 고/ 또 빨치산 또는 빨치산에 의하여 연행되어 보급부대원으로 사건의 현장 에 있었던 참고인도 빨치산의 규모를 300~400명으로 진술하고 있다.209) 즉 『한국전쟁사료.n 59권의 「전투상보」 를 제외한 기록이나 진술은 J적 무장병 력I의 숫자를 300~400명으로 보고 있다. 또 작전 관련 문서21이와 수색소대장 유삼률y 사병 김정부의 진술211)과 빨 치산으로 국군과 교전하였던 김진현의 진술212)을 종합해 보면 교전은 오후 4 시 무렵에 끝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참고인들은 사건 발생 시점을 /책까 지고 어둑역둑할 무협; /오후 4~5시/로 진술하고 있어 국군의 피난민에 대한 총격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 국군과 빨치산의 교전 과정 또는 교전 후 연행된 피난민은 영광경찰서 불갑지서y 묘량지서/ 삼학출장소와 함평경찰서 신광지서 등으로 연행되었다. 불갑지서에 연행된 청 · 장년이 옴팍골에서/ 묘량지서에 연행된 피난민이 흘 루개재에서y 삼학출장소에 자수하러 갔던 왕촌 주민은 시산재에서 경찰에 의 하여 살해된 반면f 신광지서에서 살해되었다고 진술한 사건은 없었고 빨치산 이었던 김진현 가족은 연행 도중 신광지역에서 총살되었다. 207) “20연대 소속 3개 중대 병력이 작전을 벌였지요. 이중에서 어느 부대인지 모르나 불갑 산에서 피난민들을 무차별로 죽였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습니다" 참고인 김규영 진술조서 (2008.10.10.) 208)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 59, 1988, 1009-1010쪽 209) 참고인 김인석 진술녹취(2008.9.24.); 참고인 정호범 진술녹취 (2008.9.24.) 21이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n 59, 1988, 1108쪽 211) 참고인 유삼률 진술녹취(2008.10.9.); 참고인 김정부 통화보고(2008.11.13.) 212) 신청인 김진현 진술조서(2008.9.4.) - 3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