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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51년 2월 25일 경찰은 자수하러 온 주민들을 묘량면 삼학리 일 명 시산재에서 총살하였다. 그리고 이들 중 김영길과 김영률18η은 안면이 있 던 경찰의 도움으로 생환하였고/ 김희권(당시 21세)은 살해현장에 끌려가다 대열에서 빠져나와 수로에 숨어 목숨을 보존하였다.188) 사망자들의 시신은 사건이 있고 난 뒤 왕촌 주민 김영출189)이 시산재에서 수습한 후 마을 주변에 매장하였다매이 이 사건에 대하여 신청인 김동출(당 시 14세)~ 참고인 김남식(당시 23세), 박연엄(당시 15세)~ 정복연(당시 14세)~ 김공순(당시 미출생)을 조사한 결과 김문수(당시 58세)~ 이효성(여 · ’ 59세)~ 김희창( " 29세)~ 김희남( ν 29세)~ 김희동( ν 26세)~ 김희백( " 24세)~ 김영봉( " 56세)~ 이막례(여 . "46세)~ 김영봉 자부 전 OO(여 . "22세)~ 김공순(여 . " 17세)~ 검소녀(여 . "13세)~ 김영학( " 46세)~ 검동수( " 26세), 김동수 처( 여 . "21세), 김봉순(여 . 11 20세), 김탁수( " 16세)~ 김정순(여 · ν 13세) 등이 묘량면 시산재에서 경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191) 삼학리 신성 주민 정영애(당시 19세)192)의 가족은 정영애의 시동생 김영승 이 입산하였기 때문에 영광 장안산/ 장성 태청산을 거쳐 1950년 11월 초부터 는 용천샤 아돼인 함평 책보면 산꾀리 산안에 파산하고 았었다. 정영해는 1951년 2월 20일 토벌작전 중이던 군경에 의하여 광암리 용천사 골짜기에서 삼학출장소로 연행되어, 5일후인 2월 25일 삼학리 흘루개재에서 총살되었다. 정영애의 시신은 시아버지 김갑수가 수습하여 현장 주변에 매장하였다.193) 4. 주요 규명과제별 입증사질 187) 김영길은 경찰 강대진이 보증을 하여 살아남아 20여 년 전애 사망하였고/ 김영률은 2007년에 사망하였다. 참고인 김영승 진술조서 (2008.9.9.); 조사4팀-1062(2008.11.4.) 188) 김희권은 1984년 사망하였다. 참고인 김공선 진술조서 (2008.8.28. ) 189) 김영출은 노환으로 진술을 청취할 수 없었다. 190) 신청인 김동출 진술조서 (2008.9.25.) 191) 신청인 김동출 진술조서 (2008.9.25.); 참고인 김남식 진술조서 (2008.9.25.); 참고인 김공순 진술조서 (2008.8.28.) 192) 정영애의 제적부에는 시-망사실이 1970년 10월 15일로 기재되어 있는데 정영애의 시누 이 김복례는 “올케가 영광군 묘량면 흘루개재에서 총살되었고/ 사망일지가 오기된 것 은 큰오빠 가족이 1970년대 서울로 이주하였는데 그때 사망신고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김복례 통화보고(2008.11.3.) 193) 참고인 김복례 통회보고(2008.11.3.) - 3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