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page

속에 있다가 신광지서에 연행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동생은 그날 오후 작전이 끝난 후 광암리 광동마을 정자 앞에서 불갑지서 경찰이 연행하는 것을 큰어머니 가 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불갑지서로 연행되었고 I 어머니는 신광지서로 연행 되었던 것입니다."182) 장종환과 아들 장용기는 작전이 끝나고 경찰에 의하여 불갑지서로 연행되어 1951년 2월 25일 옴팍골에서 경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2) 묘량면 사건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1잃) 왕촌 주민들은 군경의 토벌작전 2~3일 전에 “함 께 피난을 가자”는 빨치산을 따라 용천사 인근인 불갑면 자버리 노은으로 피난을 갔다. 이 때문에 작전이 끝나고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은 영광경찰서 삼학출장소에 나가 자수하였다.184) ι묘량면 삼학리 1구 왕촌은 당시 40여 가구였는데 무장빨치산은 없었지만 입산 자는 있었습니다. 삼학리 2구 신성마을에는 무장빨치산이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 서 2km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성마을 입산자들이 밤에 우리 마을에 대려화 식량 응을 가져갔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수복 직후 빨치산을 따라 갔던 것 때문에 1950년 11월 경찰에 자수하였는데 그때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 습니다. 분위기가 이러다보니 불갑산 작전 후에도 빨치산을 따라갔던 주민들이 삼학출장소에 자수를 하러 갔었습니다.'(185) 왕촌 주민 김문수(당시 58세), 김희남(당시 29세), 김희백(당시 24세) 등 30 여 명186)의 주민은 /아무 일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영광경찰서 삼학출장소에 자수하러 갔다. 182) 신청인 장만기 통화보고(2008.12.3.); 장만기의 백모 김막례(金莫禮)는 제적을 확인한 결 과 1962년 9월 25일 사망하였다. 183) 묘량면은 서해안에서 영광읍으로 연결되는 통로로서 삼학리에서는 1950년 7월 22일 오 후 인민군 6사단과 영광/ 담양경찰의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경찰은 다수의 사상 자가 발생하였고 미처 후퇴하지 못한 경찰은 인근 불갑산/ 장안산 등 산간지역이니- 주 변 민가에서 숨어 지내다 수복 후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빨치산 협조자 색출에 나섰다. 참고인 김규영 진술조서 (2008.10.10.); 참고인 김영승 띤담보고(2008.11.15.) 184) 신청인 김동출 진술조서 (2008.9.25.) 185) 신청인 김동출 진술조서 (2008.9.25.) 186)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 김동출이 진실규명 신청을 하였는데 출향/ 후손 부재 등으로 유 족 3인으로부터 참고인 진술을 청취하였다. 『 / ’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