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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은 박종한에게 함평경찰서장의 보증을 받아오라고 하였다. 박종한은 즉 시 함평경찰서장에게 보증서를 받으러 갔다 1끼 그런데 2월 24일 밤 불갑지 서에 있던 피난민이 탈출을 꾀하다 잡히는 일이 일어나자y 다음날 박종한의 처 섬복지(당시 53세)와 박종한의 자부 조복순(당시 20세)은 옴팍골에서 총 살되었다. 아들 박득수는 당시 나이가 14세여서 살아남았다. 한편 박종한의 딸 박계순(당시 18세)도 2월 20일 용천사 주변에서 신광지 서에 연행되었지만 석방되었다.178) 신청인 박득수는 2월 25일 옴팍골에서 경 찰에게 총살된 사람의 수가 250~300명 정도 된다고 진술하였다.179) 해보면 광암리 가정마을 장만기(당시 16세)는 영광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사건 직전에 마을에 돌아와 있었다.18이 장만기는 가족이 1950년 12월 경찰의 소개명령에 해보리 성매마을로 피난을 나갔는데 먹고 살 것이 없어 가정마 을에 돌아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자족은 1951년 2월 20일 새벽 총성을 듣고 마을에서 나와 용천사 위쪽으로 피신하면서 아버지 장종환(당 시 44세)과 자신/ 동생 장용기는 용천사 쪽으로 갔고 다른 가족은 장만기가 사건 이전에 파놓은 굴에 숨게 하였다.181) 이후 장만기는 아버지y 동생과 헤 어져 태청산까지 갔다고 진술하였다- 부친 장종환과 동생 장용가(당사 15섹} 는 광암리 광동마을 정자 앞에서 영광경찰에 연행되었고/ 어머니와 동생은 용천사 주변을 수색하던 경찰에 의하여 신광지서로 연행되었다고 한다. 장종 환과 장용기가 연행되는 장면은 장만기의 백모 김막례가 목격하였다. 다음은 장만기의 진술이다. /F새벽부터 총소리가 나서 밥을 먹고 바로 피난을 갔습니다. 얼마 후 포탄이 떨어 지고 총알이 날아오자 나는 아버지와 동생 용기와 함께 용천사 방향으로 갔습니 다. 이후 나는 아버지와 떨어져 부엌재를 넘어 태청산까지 갔다가 다음날 저녁 마 을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10여 일 후에 돌아오셨는데/ 어머니와 동생 셋은 굴 177) 신청인 박득수 진술조서 (2008.8.19.) 178) 박종한의 삼남 박공수가 신광지서 경찰 김봉수와 친분이 있어 석방되었다고 진술하였 다. 신청인 박득수 진술조서 (2008.8.19.) 179) “우리가 잡힌 건 보름날이고f 그 뒤로 3일을 60명 정도가 학교 교실에 있었는데f 총살 이 있었던 날 운동장에 나오니까 사람들이 운동장에 꽉 갔는데I 250에서 300명은 되겠 더 군요" 신청 인 박득수 진술조서 (2008.8.19.) 180) 신청인 장만기 진술조서 (2008.8.19.) 181) 신청인 장만기 진술조서 (2008.8.19.) - 3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