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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용천사 주변에서 군경에게 붙잡힌 주민과 같이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조사과정에서 사건 당일 전투가 끝난 후 연행된 주민과 미수복 지역 주민f 좌익 성향의 마을 주민 중 15세를 기준으로 선별하였다. 불갑면 모악리 사산 주민 정일성(당시 40세)의 가족은 군경이 토벌작전을 시작한 1950년 12월부터 자버리 노은163)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2월 19일 국군이 작전을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일성의 가족은 작전 당일 아침 묘량면 삼학리 포천으로 피신하였는데, 2월 21일 이른 아침 묘량지서 경 찰에게 연행되었다.164 ) 정일성의 가족은 삼학출장소에서 이틀칸 조사를 받고 불갑지서로 이송되었다. 당시 경찰의 주민 연행 이유에 대하여 정일성의 아들 신청인 정광전(당시 14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전투가 있었던 논동골(노은마을) 주민이 다음날인 음력 1월 16일(2월 21일) 삼 학려 포천으로 블려드는 컷을 보고 경찰이 들어와 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경찰 과 한청대원이 왔었는데 이 사람들이 포천마을 사람들을 알고 있어 그들은 그 대로 두고 외지에서 왔던 피난민들은 전부 연행하였습니다- 외지인들은 20명 정 도 되었는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부 연행하였습니다."165) 불갑지서에서 이틀을 보낸 뒤 경찰은 15세 이상의 주민들을 J사살/과 J훈방/ 두 부류로 나누었다.166) 그런데 사살대상으로 분류된 주민 중 일부가 다음날 밤중에 도망을 치다 잡혀온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경찰이 두 부류로 나 누었던 주민 모두를 2월 25일 불갑지서에서 1km 정도 떨어진 쌍운리 일명 옴팍 골로 데려다 사살하였다. 이후 경찰은 15세 이하인 청소년도 조사하였는데 “10세 이상은 무조건 죽이 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고 지서장이 차석에게 “너도 죽여야 겠다”고 위협 163) 불갑면 자비리 노은마을은/ 함평군 해보면과 영광군 불갑면의 경계지점으로 국군 제20 연대 2대대의 「전투상보」 에 따르면 6중대, 8중대/ 중포중대의 중요 잠복지점이었다. 육군본부/ r한국전쟁사료J 59, 1988, 1108쪽 164) “사산은 소개되지 않았으나 뒷마을인 압수마을에 불을 지르자 무서워서 피난을 갔습니 다. 사산마을은 경찰이 낮에만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 동태만 살피고 나갔고/ 밤에는 산 사람들이 마을에 내려왔는데 그 사람들 중에는 아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경찰이 제 부 모를 죽인 것은 작전이 있었던 날 불갑산으로 피난을 간 것 때문인데 만약 지서 쪽으 로 피난을 갔으띤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신청인 정광전 진술조서 (2008.6.24.) 165) 신청인 정광전 진술조서 (2008.6.24.) 166) 신청인 정광전 진술조서 (2008.6.24.) 씩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