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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면 용월리 내세마을 정병태(당시 25세)는 국군의 빨치산 토벌작전이 임박한 2월 18일155) 당질녀 정호순(당시 16세)과 해보면 상곡리 모평을 거쳐 불갑산 용천사 아래 마을인 산안으로 피난을 갔다)56) 산내리 산안마을로 피 난을 간 정병태는 작전 당일 총성이 들리자 이쪽저쪽으로 멀리다 마을 뒤쪽 골짜기에 숨어있었다. 작전이 끝나고 어두워질 무렵 정병태는 당질녀 정호순 을 다시 만났다. 이때 주변을 수색하던 국군이 "손을 들고 나오면 살려줄 테 니 나오라”고 하자 정병태는 정호순에게는 손을 들고 나가라고 하였으나 자 신은 나가지 않고 있다가 피난민 인파에 휩쓸렸다)5끼 이후 정병태는 행방불 명되어 시신은 수습할 수 없었고158) 정호순은 생환하여 생존하고 있다. 한편 빨치산 함평군당 함호대에서 활동하였던 김진현(당시 30세)의 가족은 사건 당시 용천사 인근 광암리 운암마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원래 대동면 금산리에 거주하던 김진현의 가족은 인민군 점령기 부역을 하였고/ 같은 마 을 함평이씨들은 우익 쪽에서 활동하였다. 군경의 진주 후 양쪽의 갈등이 심 화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김진현 일가는 불갑산에 입산하였다. 김진현은 용천사에서/ 가족은 용천사 아혜 광앙려 운암에서 각기 거주하고 있었다. 함평군당 함호대에서 활동하였던 김진현은 1951년 2월 20일 오후 2시경 용천사 아래에 있던 빨치산 2중대가 국군의 공격에 뚫리자/ 오후 4시경 함호 대원과 함께 군유산으로 후퇴하였다.159) 군유산에 피신하였던 김진현은 다음 날 다시 불갑산에 와서 가족의 행방을 확인하던 중 아버지 김재문(당시 46 세)과 동생 김덕현(당시 21세), 김치현(당시 17세)의 시신을 용천사 앞 저수지 아래에서 발견하고 수습하였다. 그러나 용천사 우측이 오후 2~3시까지 교전 지역이어서/ 김재문 등이 교전 후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었다. 김진현의 어머니 장오막(당시 46세), 처 이납순(당시 24세), 여동생 김 O O(당시 1세 · 미호적), 딸 김아기(당시 1세 · 미호적) 등은 사건 당일 오두치 155) “저는 월야변 학련에 있어서 세배가 다른 사람들보다 10일 정도 늦었는데 정병태의 아 버지인 재종조부 댁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참고인 정복연 진술조서 (2008.9.3.) 156) 신청인 정효연 진술조서 (2008.9.3.) 157) 참고인 정 호순 통화보고(2008.10.18.) 158) 신청인 정효연 진술조서 (2008.9.3.) 159) 신청인 김진현 진술조서 (2008.9.4.) - 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