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page

면 수해리는 1950년 12월 6일에l 월야면 월악리와 월야리에는 12월 7일에 국 군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살해하고 가옥을 소각하였다.150) 그 무렵 국군 제20연대 2대대 8중대는 삼계면 소재지언 사창에 주둔하였다.151) 사창에 국 군 8중대가 주둔하였지만 국군의 이동통로였던 삼계면과 삼서면 지역에서는 빨치산 '8중대/는 군경을 자주 습격하면서 군경의 토벌작전 지역의 빈톰을 자주 습격하였다. 삼서면 금산리 죽산마을 나홍주(당시 13세)는 당시 마을의 분위기를 다음 과 같이 진술하였다. “아버지가 전쟁 전에 구장을 하셨는데/ 아버지는 큰누나I 주민 7; 8명과 같이 장성 경찰서장을 따라 사창리로 나갔어요. 그 뒤 나금호씨가 입산하여 아버지가 그 사 람을 찾기 위해 마을에 오셨는데/ 청방이 나금호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여 아버 지가 청방을 저지한 적이 있어요. 또 한 번은 마을에서 청방이 반란군들에재 피살 당한 일이 있어요. 그날 이후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어요."152) 삼서면 금산리 죽산 주민 나맹주(당시 26세)는 삼서면 면사무소 직원이었 다. 그는 빨치산을 피하여 1951년 2월 19일 영광읍으로 피난을 가려 하였으 나 영광과 함평의 경계인 밀재에서 빨치산이 막고 있어서 오두치로 갔다. 다 음날 국군이 토벌작전을 끝내고 수색 중일 때 나맹주는 오두치 뒷산 밭고랑 에 숨어있었다. 군인들이 “손을 들고 나와라/ 손을 들고 나오면 살려 준다” 고 하였다. 나맹주는 자신이 공무원이어서 안심하고 손을 들고 나갔지만/ 국 군은 나맹주에게 총격을 가하였다.153) 나맹주의 총살장면은 밭고랑에 같이 숨어있던 이대식이 목격하였다. 이대식에게서 나맹주의 사망사실을 들은 가 족은 시신을 수습하였다.154) 다음날 작전이 끝났을 때 마을에서 불갑산으로 피난을 갔던 주민 중 임천수/ 엄인수/ 이대식 등 8명은 살아왔다. 15이 진실화해위원회 힘-평11사단사건 진실규명결정서 (2007.7.3. 제48차 전원위원회) 151) 신청인 나홍주 진술조서 (2008.7.11.) 152) 신청 인 나홍주 진술조서 (2008.7.11.) 153) 참고인 나금주 통화보고(2008.11.7.) 154) “불갑산 작전이 끝나고 살아남은 분들이 돌아왔는데/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형님이 오 두치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큰어머니/ 사촌누나 등 가족이 시신을 수습하였습니다" 신청인 나홍주 진술조서 (2008.7.11.); 장성군 삼보면사무소에 제적을 확인한 결과 이대 식은 전적되어 거주지였던 함평군 해보면에 확인하였으나 제적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 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