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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속한다. 이 마을 주민도 1951년 1월 29일 빨치 오두지로 피난을 나왔다. 25세)의 가족도 오두치로 피난을 교전 후에는 다른 피난민들과 나와 있었는데 함께 대밭 속에 학성리 2구에 해보면 대각리 박종오(당시 빨치산과 희성마을도 산과함께 회성마을 월 수 n 나 살려줄 테니 몰아넣고 총격을 가하였다. 박종 즈는..Q_ 프드 τ7 도:_- '2. 2. -- ' - ' - 20일 국군과 어 있었다. 박종오는 군인들이 "손을 들고 나오면 오라”고 하여 나갔는데 군인들이 방공호에 목격하였다.13끼 박기홍은 숙부 가리키며 "얼른 내려가라” 문장으로 내려와 상귀밀 당시 박종오의 처 김 00 불갑지서에 있는 것을 박기 12세)이 방향을 해보면 돌아왔다. 오의 총살 현장은 조차인 박기홍(당시 박종오의 뒤에 있었는데 군인이 모평마을 고 말하여 내려왔다고 진술하였다. 박기홍은 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학성리로 (당시 23세)138)는 군경에게 연행되었는데/ 나중에 홍의 친구 허준열이 목격하였다.139) 회성마을 서종철(당시 39세)은 아버지 서윤기(당시 72세)와 숙부 서남기는 마을에 남겨둔 채140) 어머니와 처/ 아들 서익수/ 딸과 함께 빨치산을 따라 피 난 나와 오두치에서 생활하였다. 서종철의 가족도 1951년 2월 20일 오후 국 흘어졌다. 가족 중 아들 셔익수와 역꽤나는 오두처 돼밭에 “살려줄 테니 밖으로 나오라”는 말에 서종철은 때문에 군인이 군의 총격 숨어있었고/ 밖으로 총살되었다. 서종철이 살해되는 시신은 수습하였다.141) 서익수 함께 방공호에서 가족에게 알려주어 나갔다가 다른 피난민들과 현장은 박기홍이 목격하고 는 어두워질 무렵 오두치 대밭에서 나와 군경에게 길을 물어 월야면으로 갔 다가 다음날 학성리로 돌아왔다. 같은 회성마을 김평전(당시 29세)도 아버지 김석조(당시 치산을 따라 오두치로 피난하였다. 김평전의 처는 아들 56세)와 함께 빨 김귀선(신청인 · 제적 않고 남아 있었다. 김 부상 1951년 출생)이 갓 태어난 상태여서 피난을 가지 13η 신청인 박기홍 진술조서 (2008.9.2.) 138) 김 00는 혼인신고가 되어있지 않아 족보에서 혼인사실과 사망사실을 확인하였다. 139) 허준열의 가족 역시 불갑지서로 연행되었지만 허준열은 당시 12살이어서 석방되었다. 허준열의 제적사실을 확인한 결과 1990년에 사망하였고 후손은 확인할 수 없었다. 140) “할아버지 서윤기와 종조부 서남기는 1951년 2월 18일 마을에서 군인들에게 관동마을 로 끌려가 그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서익수 진술조서 (2008.9.2.) 141)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검은 두루마기에/ 버선은 솜을 넣어 헤드렸는데 이를 확인하여 시신을 찾아왔습니다" 서익수 진술조서 (2008.9.2.) - 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