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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의 처 이귀금은 사건 당일 밤 현장을 빠져나와 학성리에 돌아왔다.131) 김영만의 가족과 함께 피난민 행렬에 있었던 참고인 박봉옥의 진술이다. “군인들이 오두치 위 방공호에 총을 쏘아대니 정신없이 밀려다녔고/ 이때 김권 섭의 삼촌과 누나도 피난민 대열에 끼어 휩쓸려 다녔습니다. 피난민 행렬에서 그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 후 이 사람들이 오두치에서 행방불명되었다고 들었 습니다. 저는 그날 신광지서로 연행되어 3개월 정도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13깅 같은 학성리 원촌마을 주민 김마철(당시 52세)의 가족도 1951년 1월 29일 빨치산을 따라 오두치로 피난을 갔다. 김마철은 사건 당일인 2월 20일 군인 들에 의하여 빨치산이 파놓은 방공호로 몰아넣은 상태에서 총살되었다. 한편 김마철의 아들 김재경(당시 24세)은 불갑지서로 연행되었다. 김마철의 시신 은 가족이 오두치에서 수습하여 삼서면 우치리에 매장하였다.133) 다음은 김 재경의 행방에 관한 황재영의 전언 진술내용이다‘ "학성리 원촌마을애 살았던 황재영씨가 있어요. 이 분은 나이가 72, 73세이고 현재는 서울 어디에 살고 있을 것인데 연락처는 모르겠어요. 예전에 이 분에게 서 형님의 행방에 관하여 들었어요. 이 분은 군경에게 묶여 불갑지서로 갔다가 살아 왔는데 제 형님이 불갑지서에 묶여 있었던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1끊) 학성리 원촌 주민 박종원(신청인 · 당시 19세)의 아버지 박연수(당시 56세) 와 어머니 정중산(당시 55세), 숙부 박장수(당시 53세), 누나 박순덕(당시 23 세),135) 생질 김형구(당시 1세 · 미입적) 등 일가족도 오두치로 피난을 가서 움막생활을 하였다. 박종원은 국군의 오두치 공격이 시작될 무렵 가족과 헤 어졌다. 다른 가족은 국군이/ 빨치산이 파놓은 방공호로 밀어 넣어 총살하였 다. 시신은 생존자 박종원이 문만섭에게서 사망 장소를 듣고 수습하였다.136) 131) 신청인 김권섭 진술조서 (2008.7.10.) 132) 참고인 박봉옥 통화보고(2008.12.4.) 133) 김마철의 희생사실은 문만섭이 목격하였다. 신청인 문만섭 진술조서 (2008.8.19.) 134) 신청인 김재수 진술조서 (2008.7.10); 황재영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하여 장성군 삼서떤에 제적부 확인을 의뢰하였으나 확인하지 못하였다. 135) 박순덕은 결혼 후 친정에서 살았다. 신청인 박종원 진술조서 (2008.9.2.); 박순덕은 제적 부 확인결과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 136) “두어 달쯤 지나 문만섭과 함께 가서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아버지는 솜옷을 두 벌 입 으셨고/ 어머니는 미끄러지지 않게 흰 고무신 위에 짚신을 신으셨는데 이를 보고 두 분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신청인 박종원 진술조서 (2008.9.2.) - 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