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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과 함께 J세 마 일가도 다른 학성리 움막을 치고 생활하였다. 문만섭/ 사촌 문점섭(당시 14세) 등 지기 정도/의 밭에 ..fL 。 산내리 산안 쪽에서 총성이 들렸고 뒤이어 들렸다. 총소리에 놀란 피난민들은 뿔뿔이 흩어 부부와 문덕례(여 · 당시 9세), 문덕남(남 · 당시 문덕순(여 • 당시 1세) 4남매 모두 불갑지서로 남매는 2월 25일 불갑면 쌍운리 불갑지서에 남아았던 문덕례y 문덕남 1951년 2월 20일 동틀 무렵 천사 주변 곳곳에서 총성이 졌고 문대자의 가족은 문대자 8세), 문경 남(남 • 당시 3세), 연행되었다. 문대자 부부와 문경남/ 문덕순 옴팍골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빽빽이 남매 는 2월 25일 석방되어 같은 마을 주민 황재영121)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문만섭은 2월 20일 석양 오두재에서 국군이 넣고 총격을 가할 때 오른팔과 왼쪽가슴 등 어머니y 형/ 사촌형과 헤어진 붙잡은 피난민을 방공호에 밀어 못하 가족의 시신은 수습하지 살아남았다.122) 문만섭은 입었지만 효느λ)-Q 。 。 였다. 에 ”저는 오른팔과 오른 쪽 귀 위/ 그리고 왼쪽 가슴에 총을 세 방 맞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후퇴한 다음에야 가슴의 총상자리에서 피가 흐르지 않게 막고 통증을 참으면서 집으로 왔습니다. 이틀 동안 호 안에 있을 때는 군인들이 군횟발로 제 이마를 차면서 “야 일어나/ 일어나”하면서 죽었는가를 확인하였습니다. 학성리 에 살았던 김재수의 아버지 김마철과 형 김재경/ 그리고 서익수의 아버지 서종 철 등도 오두치 뒤 능선으로 피난을 나왔었습니다. 박종원의 아버지/ 어머니/ 누 나와 박종원의 생질은 제 등 위에서 죽어서 제가 나중에 방공호에서 나올 때 그 자리에 표시를 하였고 후에 박종원을 데리고 가 시신을 수습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박종원에게서 고무신 한 컬레를 받기도 하였습니다.“123) 손녀 문복순(당시 4세 · 남았다가 문대자의 가 마을에 문석 암(당시 52세)과 빨치산을 따라가지 않고 불갑산으로 간 다음날인 1951년 1월 30일 으 램 암 마 셔「 문 막내숙부 노약자여서 따라 을 째 운 뺏 넘겨 적 l 문 호 이 미 족 들어 총살되 었다고 한다.124) 온 국군에 의하여 12이 안。 o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제적부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121) 장성군 삼서면사무소에 황재영의 제적부 발급을 의뢰하였으나 제적부가 존재하지 않아 황재영의 신원은 파악할 수 없었다. 122) 신청 인 문만섭 진술조서 (2008.8.19.) 123) 신청인 문만섭 진술조서 (2008.8.19.) 124) "제가 피난 나온 다음날 빨치산이 빠져나가자 군인들이 삼서떤 학성리에 - 325 - 들어와 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