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page

군이 다시 내려올 것r이니 불갑산으로 가는 게 안전하다고 하였다.115) 이에 학성리 원촌과 회성마을 주민은 빨치산을 따라서 장성군 삼서면 대 도리 관동 =추 함평군 월야면 월계리 서당골 =응 해보면 금계리 밀재 =} 해보 면 산내리 산안을 거쳐 오두치로 피난을 갔다.116) 오두치에서 이들 학성리 주민은 오두치 뒤 능선의 밭에 움막을 치고 피난 생활을 하다 1951년 2월 20일 국군의 토벌작전을 맞았다.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에서도 학성리보다 앞선 1월 24, 25일 빨치산이 마 을에 들어와 주민들에게 11군경이 작전을 들어오면 죽일 것이니 함께 피난을 가자”고 하여 주민들은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까지 피난을 갔다가 3월에 돌아왔다 11η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원촌에 거주하던 문만섭의 이복형 문대자(당시 42 세)와 문대자의 처 김귀례(당시 26세) 등 일가는 빨치산과 함께 함평군 해보 면 대각리 오두치로 피난을 나왔다가 희생되었다. 다음은 사건 현장에서 살 아남은 문대자의 이복동생 문만섭(당시 18세)의 진술이다. u학성리 원촌에 살았는데f 군경의 작전에 장성 빨치산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지­ 우리 동네에 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군인들이 작전을 계속하니까 빨치 산이 불갑산으로 가야 하는데 주민들을 그대로 두고 가변 자기틀 간 곳을 국군 에게 가르쳐준다면서 노인을 제외한 주민들을 인질로 삼아 불갑산으로 데려갔 습니다. 주민들을 끌고 나올 때 따라가지 않으면 반동으로 몰아서 죽이는 상황 이었습니다. 빨치산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을 죽이는 것을 제가 보지는 못하였지만 삼서면 소재지에 군인들 진주 후 동네 뒷산에서 가족이 빨 치산에게 돌아가신 분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보았습니다."118) 문대자의 가족과 이복동생 문만섭의 가족은 따로 움막을 치고 생활하였는 데,119) 문만섭의 모 안 00 120)(당시 60세 추정), 둘째형 문경섭(당시 33세), 115) 신청인 박종원 진술조서 (2008.9.2.) 116) 신청인 박종원 진술조서(2008.9.2.) 117) “1951년 1월 24, 25일경 밤에 친구들과 피난을 갔는데 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틀 후 쌍치에 도착하였습니다. 피난 가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던 청장년 18명은 3일 뒤인 1월 26일 마을에 들어온 경찰이 총살하였습니다" 신청인 김영태 진술조서 (2008.7.9.) 118) 신청인 문만섭 진술조서(2008.8.19.) 119) 신청 인 문만섭 진술조서(2008.8.19.) - 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