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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산리에서 빨치산에 같이 꿀려갔다가 도망쳐 나온 주민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 시신은 수습하지 못하였다)0'끼 나산면에서 보급부대원으로 끌려갔던 주민들은 오두치에서 나산면당의 관 리를 받고 있었다. 최승원 역시 빨치산에 끌려가 나산면당의 관리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호범은 “오두치에서 교전은 없었고/ 군인들이 들어오면 서 피난민은 연행하고 도망하는 사람은 현장에서 즉시 총격을 가하여 사살 하였다”고 진술하였다.108) 빨치산에게 보급부대원으로 잡혀 갔던 최숭원도 오두재에서 국군의 총격에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주민 희생사건 해보면 대각리 오두치에는 1950년 11월 중순부터 목포 무안의 노동당 산 하 조직이 입산하였고,109) 산내리 산안의 민가에는 국군의 불갑산 토벌작전 직전인 1951년 1월 말부터 장성군 삼계 · 삼서면당 산하 조직이 들어와 민가 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오두치 뒤 오두재 능선에서는 빨치산을 따라온 장 성지역 주민이 생활하고 있었다.110) 태청산 아래인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111) 원촌/ 회성마을에는 1950년 12월 중순부터 삼서면당 기간요원과 빨치산112)이 주둔하였는데,113) 빨치산은 군경 의 토벌작전에 밀리자 “1951년 1월 29일 주민들에게 자신들과 함께 불갑산 으로 가자고 선동하였다”고 신청인 문만섭(당시 18세)은 진술하였다.114) 빨치산은 주민들에게 /군경이 들어오면 모두 죽일 것이고/ 머지않아 인민 107) “최숭원이 불갑산에 있었다는 말은 같이 끌려갔던 주민에게 들었는데 어렸을 때라 이 름은 모르겠습니다. 시신은 찾으러 가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참고인 김은수 통 화보고(2008.10.30.) 108) 참고인 정호범 진술녹취 (2008.9.24.) 109) 참고인 김영승 진술조서 (2008.9.9.) 110) 신청인 문만섭 진술조서 (2008.8.19.) 111) 신청인 박종원의 진술에 따르면 JI당시 학성리에서 오두치로 피난을 간 주민이 60가구 정도였다”고 한다. 신청 인 박종원 진술조서 (2008.9.2.); 1990년대 초 상무대가 들어서서 현재는 삼서면 학성리 원촌과 회성마을이 존재하지 않는다. 112) 학성리에 주둔하였던 빨치산은 장성빨치산 8중대였는데 중대장은 삼서면 대곡리 출신 나승기였다. 참고인 김영승 진술조서 (2008.9.9.) 113) 신 청 인 박종원 진술조서 (2008.9.2.) 114) 신 청 인 문만섭 진술조서 (2008.8.19.) - 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