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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범은 국군의 총격에 피난민들이 밀리는 상황에서 행방불명되었는데/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찍 이상범이 행방불명되던 당시 상 황에 대하여 상곡리 운곡 주민 윤기병(당시 21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5중대가 해보면 문장에 주둔한 뒤 주변에서 주민들이 피해를 입자 불갑 산에 들어갔는데 이상범은 저보다 20일 정도 늦게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은 자 신의 아버지 이계병씨가 경찰에게 돌아가신 데다f 군경이 작전을 들어오면 주민 들이 피해를 입으니 이를 피하여 불갑산 오두치로 왔던 것업니다. 대보름작전이 았던 날 오전/ 군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자 나는 가정마을까지 밀려 내려갔는데 이때 이상범도 같이 내려갔습니다- 그때가 오후 늦은 시간이고 국군의 총격에 피난민들이 밀리는 상황이라 그 뒤로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93) 나) 나산면 주민 희생사건 나산면 수상리 유덕마을 청년들은 음력 9월경부터 빨치산에 의하여 수시 로 용천사 아래 오두치로 끌려갔다. 끌려간 청년들은 빨치산 생산유격대가 마을에 식량약탈을 나올 때 함께 데리고 나와 주민들로부터 빼앗은 물자를 져 나르는 일을 하였다.94) 정점수(당시 22서0, 이공범(당시 28서[), 김현두(당시 28세), 엄병두(당시 20 세), 정호범(당시 22세) 박 00, 편 00, 정 00 등 유덕마을 청년들은 한밤중 에 집까지 찾아온 빨치산에게 오두치로 끌려갔다. 1951년 2월 20일 불갑산 대보름작전이 끝난 뒤 피난민 행렬에 았던 정점수/ 이공범/ 김현두/ 엄병두는 국군의 총격에 사망하였다. 당시 빨치산에 의하여 보급부대원으로 오두치에 끌려갔다가 생환한 생존자인 정호범의 진술이다. “저는 1950년 음력 10월 밤에 빨치산에게 보급부대원으로 용천사 아래 오두치 부근으로 잡혀가/ 나산면당의 관리를 받았습니다. 우리 동네에서만 10명 정도 가 끌려갔습니다. 우리는 움막생활을 하면서 밤에는 나산면 월봉리/ 신광면 등 지로 빨치산을 따라가 그들이 빼앗은 식량 등을 운반하였습니다. 생명의 위협 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밤에 도망치다 잡힌 사람이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보았습니다. 대보름직-전 때는 우리를 관리하였던 나산면당은 먼저 도망 92) 참고인 윤기병 통화보고(2008.11.5.) 93) 참고인 윤기병 진술조서 (2008.8.22.) 94) 참고인 정호범 진술녹취 (2008.9.24.) - 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