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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읍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해보리 감매마을에 살았던 정창훈(당시 25 세)은 주변에서 군경의 토벌작전 과정에 민간인 희생사건이 빈번하자 불안감 을 느끼고 불갑산 안쪽에 피신해 있었다. 정창훈은 대보름작전 때 산안에 있 었는데 빨치산과 교전을 끝낸 군인들이 위쪽에서 피난민에게 총을 쏘면서 내려오니 정신없이 도망을 하다가 군인들의 총에 사망하였다.8η 정창훈의 딸 정세심(당시 3세)은 “어머니가 불갑산작전이 끝나고 산내리 산안마을 아래쪽 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인 해보리 감매마을에 매장하였다”고 진술하였다.88) 산내리 산안마을에서 장성군 삼서면 금산리 화산으로 시집갔던 박길례(당 시 17세)는 1951년 3월 태청산 작전이 끝난 다음에야 산안에 가서 주민 장종 수로부터 아버지 박정순(당시 44서1), 계모 김순례(당시 28세), 동생 박순례 (여 · 당시 11세), 박순월(여 · 당시 7세), 박순자(여 . 5세)가 국군의 총격에 사 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89) 박정순 가족의 사망에 대하여 주민 장종수(당 시 25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11박길례 아버지 박정순은/ 불갑산작전 이전에 경찰의 소개명령에 따라 가족은 산안에 두고 혼자만 해보면 상귀밀에 소개 나갔습니다. 그런데 식량이 떨어져 식량을 가지러 왔다가 대보름작전 때 산안마을 뒤 꽃잔등에서 군인들에게 전 가족이 함께 죽었다고 들었습니다꺼0) 산내리 산안마을 주민 이상범(당시 51세)은 전쟁 직전 아버지 이계춘이 경찰에 의하여 살해되고 주변에서 민간인 희생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군경 을 피하여 산내리 오두치로 올라갔다.91) 그 후 불갑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있 었던 1951년 2월 20일 오후 늦게 윤기병과 함께 가정마을 고랑까지 밀린 이 86) 참고인 김 길선 통화보고(2008.11.5.) 8η 참고인 정 진훈 통화보고(2008.12.3.) 88) “군경의 토벌작전 과정에 민간인 피해가 자주 발생하자 아버지는 불갑산으로 피난을 가 셨다는 말씀을 해보면 감매마을에 계시는 숙부 정진훈에게 들었습니다" 신청인 정세심 2차 진술조서 (2008.9.4.) 89) 신청 인 박길례 진술조서 (2008.7.11.) 90) 참고인 장종수 통화보고(2008.10.20.) 91) 참고인 윤기병 진술조서 (2008.8.22.) - 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