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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에서 교전 후 수색과정에서 피난민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 지역을 사망지점이라고 진술한 신청언은 없었다.81) 3) 해보면 대각리와 산내리 가) 해보면 주민 희생사건 해보면 대각리는 오두치/ 각궁/ 회화정 등 3개 마을이 었다. 각궁과 회화 정은 용천사와 5km 이상 떨어져 있어 이 지역 피난민은 국군의 공격지점 위 쪽에 있었다.s강 1951년 2월 20일 제2대대의 교전상황에 대하여 「전투상보」 에는 '5중대 는 나산면 초포리를 출발하여 오후 1시40분경 해보면 대각리 오두재 방면에 서 공격하자 적은 용천사 방면으로 도주하였고y 이후 금계리 남쪽에서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잠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6중대는 12시에 불갑산 영실봉을 점령하고 진지 구축 후 적을 추격하고 283.4고지에 잠복하였다f고 기록되어 있다.83) 그리고 당셔 빨치싼 1중래의 버무장래원으로 사건 전에 풀갑사 용천사에 있었던 참고인 김인석은 빨치산 1중대가 있었던 지역은 산내리 산안 위쪽이 라고 진술하였다.84) 또 광암리 운암 주민 장재수(당시 15세)는 피난민과 빨치산이 국군의 총격 때문에 운암 뒷산을 념었고 오후 2시 이후에는 산안 뒷산에서 국군의 추격 을 받아 용천사 방향으로 밀렸다고 진술하였다.85) 신청인 장재수와 참고인 김인석의 진술/ 그리고 「전투상보」 에 기록된 내용으로 볼 때 오후 2~3시경 에는 산안마을 위쪽에서/ 용천사 위 영실봉에서 용천사를 향하여 내려오는 국군과 용천사에 았던 사령부를 사수하려는 빨치산 간의 교전이 있었을 것 이다. 교전 후 국군의 총격에 산내리 산안에 았던 피난민은 뿔뿔이 흘어졌고 이들 중 상당수가 가정/ 오두치/ 산안마을 등에서 사망하였다.86) 81) 이 사건 조사과정에 장소를 특정하지 않은 희생자는 있었지만 조사에서 제외하였다- 82)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J 59, 1988, 1112쪽 83) 육군본부y 『한국전쟁사료.J 59, 1988, 1108쪽 84) 참고인 김인석 진술녹취 (2008.9.24.) 85) 신청인 장재수 진술조서 (2008.9.3.) - 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