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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출동해서 오후에 우리가 목표했던 고지를 점령하였습니다. 나는 이날 전투에서 머리와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y 전투 후 민간인 네 사람이 나를 당가에 싣고 밤을 새워 해보면 소재지 해보국민학교에 내려왔습니다. 그때 해보국민학 교에는 부상자가 꽤 있었습니다."76) 빨치산 또한 2중대가 초기에 궤멸된 것과 달리 빨치산 1중대는 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였다.77) 그러나 오후 4~5시경 빨치산은 용천사를 포기하고 군유산 쪽으로 퇴각하 였다. 다음은 당시 함호대 간부였던 참고인 김진현(일명 김수원)의 진술이다. “용천사가 국군에게 점령된 후 육탄전으로 뚫고 나올 때 함호대는 처음으로 총 기를 사용하였습니다. 국군의 총격에 함호대 부사령관 김문현은 전사하였고/ 사 령관 김용범(일명 백구)은 부상을 입었으며f 대원 3명도 전사하였습니다. 이후 용천사가 국군쾌케 점령되자 우측 야산으로 1패려와 패동면과 선광변 경계지점 을 육탄전으로 돌파하여 군유산으로 후퇴하였습니다."78) 한편 제20연대 수색소대는 이때 빨치산을 건무산 방향으로 격퇴시키고 172코자섹셔 장r복하역 빨처산을 차단하련서 주변을 수썩하였다.79) 그러나 당시 수색소대장 유삼률은 빨치산과의 교전 내용과 결과에 대하여 「전투상보」 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진술하였다. 유삼률은 빨치산과 수색소대의 교전사실 자체를 부인하면서 「전투상보」 의 /적 사살 70명/이라는 기록에 대해서도 부인하였다.80) 구수재/ 노은재 부 76) 참고인 양창규 녹취보고(2007.12.12.) 77) “오후 3시나 되었을까 해서 합동공격 명령이 내려져 탈환작전이 들어왔습니다. 1중대 소속 무장부대는 용천사에서 일찌감치 후퇴하여 산안 뒷산으로 가서 이전에 만들어 놓 았던 방공호로 모두 올라가 늦게까지 버렸습니다. 무장부대는 실탄이 떨어지니 모두 빠 져나갔는데 비무장인 말단만 남아 있었습니다" 참고인 김인석 녹취보고(2008.9.24.) 78) 참고인 김진현 진술조서 (2008.9.4.) 79) 육군본부/ F한국전쟁사료.! 59, 1988, 1109쪽 80) “연대장의 지시는 불갑산 아래에 매복하여 있으면 피난민이나 빨치산이 밀고 내려올 것 이니 양쪽에 5명씩 매복하고 있다가 인민군/ 피난민이 내려오면 총격을 가하지 말고 아 래쪽으로 유인하여 체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을 함평국민학교로 인솔하 여 그곳에서 분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연대장의 구두 작전지시는 /사살명령은 내리 지 말고 공포탄을 쏘아 그 안애 있는 사람들을 토끼몰이 하듯이 몰아 아래에서 잡으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빨치산이 아군을 위협하였다면 응사하였겠지만/ 작전지시 내용 은 분명히 생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전투상보」 의 /적 사살 70명r은 사실과 다릅니다" 참고인 유삼률 진술녹취 (2008.10.9.) - 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