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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곡리 모평에 살았던 윤순병(당시 23세)은f 1951년 1월 12일 마을에 들어 온 5중대 군인들에게 마을 앞으로 불려나간 형수 정영환(여 · 당시 28세)이 주민들과 함께 총살되자 신변의 불안을 느껴 같은 마을 윤만호 등과 함께 불갑산 용천사 아래 오두치로 피난하였다. 오두치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윤순 병은 1951년 2월 20일 빨치산과의 교전을 끝낸 국군에게 쫓겨 가정마을까지 밀려왔다. 피난민 속에서 윤순병과 마주쳤던 윤기병은r 사건 후 주민에게서 윤순병이 종조부와 함께 대보름작전 때 군인들의 총격에 사망하였다는 이야 기를 들었다. 다음은 윤기병의 진술이다. “저는 그날 하루 내내 작전을 겪었는데 가정마을 고랑에서 윤순병을 만났다가 어느 순간 헤어졌습니다. 나중에 오두치에서 함께 피난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에 게 들었는데/ 윤순병은 가정마을 고랑에서 저의 종조부와 함께 밀려다니다가 군인들에게 총을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윤순병의 사신은 수습하지 못한 것으 로 알고 있습니다."73) 2) 해보면 구수재와 건무산 부근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 일대 소탕전/이 있었던 1951년 2월 20일 12시 국 군 제2대대 6중대는 불갑산 정상 영실봉을 점령하고 빨치산사령부가 있던 용천사를 집중 공격하였다. 6중대는 금계리에 았던 8중대의 지원을 받으 면서 빨치산을 건무산 방향으로 몰아붙였다.껴) 이날의 작전결과는 「전투상보」 의 전과기록에 나타나는데 /피해현황f에는 이날 국군 사상자 중 6중대와 8중대 사상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7 5) 6중대의 전투에 대하여 제주 출신으로 당시 6중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하였 던 참고인 양창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시켜 여러 구의 시신을 모아 흙으로 덮어버려 힘들게 시신을 수습하였습니다. 시선을 찾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가서 시체 더미를 덮은 흙을 뒤져서 찾아냈습니다. 당시 아머니 가 만들어드린 토씨와 도장으로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신청인 김재병 진술조서 (2008.8.19.); 이노보의 제적부를 확인한 결과 1954년 사망하였다. 73) 참고인 윤기병 통화보고(2008.11.5.) 74)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J 59, 1988, 1108쪽 75) 6중대와 8중대의 전과를 보면 2대대 전시. 3명 중 2명/ 부상 24명 중 19명으로 2대대 전 체 인명피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JJ 59, 1988, 1110쪽 - 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