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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선은 “진용섭은 오두치에서 피난생활은 함께 하였는데 국군의 총격이 있을 무렵 행방불명된 것 같다”고 진술하였는데/ 진용섭 역시 이 무렵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6어 진용술의 서신은 한 달여가 지 난 음력 2월 가족이 가정마을 고랑의 희생현장에서 수습하여 회화정에 매장 하였다. 다음은 진용술의 아들 진부언(당시 5세)의 진술이 다. “아는 분들이 이야기를 해주어 어머니께서 시신을 수습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아 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시간이 꽤 지나다 보니 시신이 부패되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어머니가 아버지 발톱을 보고 확인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시 신은 회화정 마을 앞에 매장하였다가 나중에 선산에 이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삼 촌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습니다."70) 월야면 월악리 노동마을 주민 김봉현(당시 42세)은 전쟁 이전부터 인민군 점령 이후까지 마을에서 구장을 하였다. 수복 이후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신 변의 불안을 느낀 김봉현은 월야면 월야리 친지의 집에 피신하였다고 한다. 피신 중이던 김봉현은 식량을 가지러 집에 왔다가 돌아가던 중 빨치산에게 붙잡혀 불갑산으로 끌려갔다. 빨치산은 김봉현 등 붙잡아간 주민들을 가정마 을에서 살게 하였는데/ 대보름작전 때 김봉현은 가정마을 뒤에서 국군에게 살해되었다. 다음은 김봉현의 아들 신청인 김지}병(당시 18세)의 진술이다. "빨치산들이 아버지에게 면소재지로 돌아가면 스파이 노릇을 할 것이라면서/ 따라 오라고 했답니다. 아버지가 빨치산과 함께 가신 곳이 광암리 가정마을이었습니다. 당시 가정마을에는 빈 집이 많았는데 아버지를 그곳에 살게 했답니다. 그 후 아버 지는 식량을 가지러 마을에 오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한 이노보씨도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이노보씨가 작전 후 살아 돌아외-서 아버지의 사 망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대보름작전이 있던 그날 폭도 들은 다 불갑산 정상으로 피하였고/ 피난민은 산으로 쫓겨 갔는데 아버지는 가정 마을 뒷산에서 군인들의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71) 생환자 이노보에게서 김봉현의 사망소식을 들은 아들 김재병은 나중에 가 정마을에 가서 시신을 수습하였다.72) 으 E 드 E 핀디 시 서 애 서 지 쩍 전 지「 산 기심 꾀긍 데 는 았 이 E 룹 、」 / - 지。 j/ 17 17 - 5 9 9 시 ζ 끄 X X 가 m m m E 힌 괴 세 세 서 보 조 조 、어 화 술 술 주 통 진 진 려 선 언 벙 알 길 부 재 가 김 진 김 씨 인 인 인 펴 고 처 O 처。 G jxn 시 L 시 L % ” 께 찌 찌 - 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