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page

운암에 거주하였던 김석주(당시 21세)는 해보면 대한청년단원으로 근무하 고 았었다고 한다. 김석주는 1951년 설을 앞두고 옷을 갈아입기 위하여 해보 리 모산마을 지인의 집에 들렸다가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이후 김석주는 대 각리 오두재에 있던 I빨치산의 감옥/에 았다가 2대대의 작전이 시작될 때 뛰 쳐나와 총격을 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 진순비(당시 44세)와 동생 김동주(남 · 당시 13세), 김금순(여 · 당시 11세)은 국군의 총격에 사살되 었다. 다음은 김석주의 진술이다. "군인들이 총을 쏘고 들어오자 어머니는 동생 옥금(여 • 당시 16세), 동주/ 금순 과 함께 아침 일찍 불갑산 용천사 위로 피신했습니다. 저는 10시경에 감옥에서 나와 피난민 속으로 갔는데 그때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식구 들이 모여 었으면 죽을 수 있으니 따로따로 피난을 가자/고 하셔서 저만 태청산 으로 피난을 갔다가 3일 후에 돌아왔습니다. 태청산에서 돌아와 보니 정월 보름 날 오후 가족이 모두 군언들에게 붙잡혔는데 옥금이는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아래로 굴러 살아남았고/ 어머니와 두 동생은 총살되었다고 하였습니 다. 옥금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바로 뒤에 군인들에게 다시 잡혀 신광면 경찰 고지까지 갔다가 보름 후에 풀려났습니다. 어머니와 두 동생의 시신은 찾으러 다니기가 겁이 나 수습하지 못하였습니다 "6η 나) 가정마을 대각리 회화정 주민 진용술(당시 27세), 진용섭(당시 20세) 형제는 오두치 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는데 진용술은 가정마을에서 국군의 총격에 살해되었 고/ 진용섭은 행방불명되었다. 진용술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오두치에서 진용 술과 함께 피난생활을 했던 윤기병(당시 22세)은 “군인들의 총격에 오두치에 서부터 광암리 가정마을 앞까지 정신없이 쫓겨 왔다. 가정마을 뒤 산 고랑으 로 피난민들이 몰렸는데 군인들이 피난민을 향하여 총격을 가하자 흩어졌고 어느 순간 진용술도 보이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68) 또 함께 피난생활을 했 던 김길선(당시 22세)도 “군인들애게 쫓겨 온 사람들로 온 산이 하쌓게 되었 는데 진용술도 가정마을 고랑에서 사망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한편 참고인 6끼 신청인 김석주 진술조서 (2008.8.19.) 68) 참고인 윤기 병 통화보고(2008.11.5.) - 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