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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숙모님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여 숙모님이 업고 나갔습니다. 저와 동생 박길천도 처음에는 군인들이 데려가려고 하였는데 지휘 자로 보이는 사람이 J어린애이니 두고 가자/고 하여 저와 동생은 집에 있었습니 다. 이때 아버지가 군인들에게 손을 모아 빌면서 ”하루만 살려 달라“고 하여도 아버지에게 ”요 개새끼“라고 욕을 하면서 끌고 갔습니다."63) 국군은 박순용의 가족 3명은 집 앞에서 사살하고y 박순용은 신광방면으로 연행 도중 살해하였는데 남은 가족 중 성인이 없어 시신은 수습하지 못하였 다.64) 경찰의 소개명령에 대창리 성대마을로 피난 나갔다가 1950년 12월 31일 5 중대 군인들에게 아버지 장진섭 등 일가족 7명을 잃은 장재수(당시 15세)65) 는 1951년 2월 20일 불갑산작전이 있던 날 아침 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운 암마을 뒷산을 념어 산안 위쪽으로 피신하였고 이후 용천사 앞y 밀재를 지나 다음날 새벽 장성 태청산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한편 장재수의 외할머니 방 매실(당시 79세)은 노령이어서 1950년 12월 경찰의 소개명령에도 피난을 가 지 못하고 마을에 남아 있었다. 그 후 장재수가 설을 쇠고 마을에 돌아왔을 혜 그의 잡은 함평군당 치랑좌역이 사용하여 펴할머니와 함께 기거할 수 없 어 외할머니에게는 인사만 하고 숙부 장순섭의 집에 머물렀다. 사건 후 장재 수는 함평군 신광변의 매형 집에서 기거하다 한 달여가 지나 운암마을로 돌 아왔다. 장재수가 외할머니를 다시 찾았을 때 그의 외할머니는 작전을 끝낸 군인들이 지른 불에 소사하였다. 다음은 장재수의 진술이다. "사건 이후에 매형이 신광지서 경찰이어서 신광면 삼덕리 미}형 집에 기거하였 는데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낮에만 출입을 허용하여 운암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 다. 마을에 가보니 가옥은 완전히 불에 타버렸고 동네는 시신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로 붐렸는데/ 일부 주민은 불탄 가옥들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외할머니를 찾으러 집에 가보니 외할머니의 시신은 불에 탄 채로 웅크리고 계셨습니다. 외 가에 바로 연락하여 외할머니의 시신을 수습하였습니다." 66) 63) 신청인 박정숙 진술조서(2008.9.2.) 64) 광암리 운암마을 주민 박용원은 신청인 박정숙 조사 시 박순용의 희생사실에 진술하였 다. 참고인 박용원 통화보고(2008.9.2.) 65) 진실화해위원회, F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J , 2007, 513쪽 66) 신 청 인 장재수 진술조서 (2008.9.3.) - 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