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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이 국군에 의하여 완전 점령되었다. 또 운암마을에 았던 함평군당의 함호대58)도 국군의 총 · 포격에 /총 한 번 쏘아보지도 못하고I 신광면 군유산 방면으로 퇴각하였다.5키 그러나 빨치산 1중대는 사령부를 사수하기 위하여 오후 2~3시 무렵까지 용천사 후방부터 영실봉에 이르는 지역에서 국군과 치열하게 교전을 하였다. 빨치산 1중대 비무장대원이었던 참고인 김인석은 빨치산이 완전히 빠져나가 고 국군이 빨치산사령부를 점령한 것은 오후 4시경이었다고 진술하였다.6이 국군과 무장빨치산의 교전이 끝나고 빨치산이 퇴각하자 운암과 광동마을 에 남아았던 피난민은 국군의 총격을 피하여 마을 뒷산을 넘어 대각리 오두 재 방향으로 몰려갔다. 이와 같이 빨치산사령부가 었던 용천사를 사이에 두고 앞과 뒤에서 빨치 산과 국군의 교전이 계속되자 오두치로 밀려갔던 피난민 행렬은 다시 광암 리 운암마을 뒷산으로 밀렸다.61) 이때부터 국군은 용천사 주변 산야와 민가를 소각하였고 운암/ 광동/ 가정 마을부터 수색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군은 집안에 있던 주민들을 동 네 앞으로 끌어내어 총살하거나 연행하였다. 당시 광암리 운암마을어] 살았던 박순용(당시 34섹}의 가족은 출싼을 앞둔 처 김재임(당시 27세)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제수 강갑순(당시 27세), 질녀 박일례(당시 1세)와 함께 집안에 있었다.62) 전투를 끝낸 군인들은 마을 을 수색하면서 박순용의 집에 들어오} 만삭의 김재임 등 가족을 끌어냈다. 사 건을 목격한 박순용의 딸 신청인 박정숙(당시 8세)의 진술이다. FI그날 아버지는 출산을 앞둔 어머니를 수발하기 위하여 아리저리 왔다 갔다 하 셨고 숙모님은 미역을 씻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우리가족을 불러내자 사촌동 58) “함호대 사령관은 김용범(일명 /백구'), 부사령관은 김문현이었습니다"참고인 김진현 진 술조서 (2008.9.4.) 59) 참고인 김진현 진술조서 (2008.9.4.) 60) “1951년 2월 20일 불갑사령부 빨치산은 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피난민이 용천사 방향 으로 몰려들어 우측의 월호대 · 목호대 - 무호대/ 중앙의 함호대/ 그리고 그 옆의 영호대 는 총 한 방 제대로 쏘지 못했습니다. 국군의 공격이 시작된 후 오후 2시경에 용천시 우측에 월호대와 무호대가 지키고 있던 곳이 뚫렸습니다" 참고인 김진현 진술조서 (2008.9.4.); ι빨치산 1중대 소속 무장부대가 오후 3-4시경까지 버렸는데 이때 용천사에 서 나와 산안 뒷산으로 갔습니다" 참고인 김인석 진술녹취 (2008.9.24.) 61) 신청 인 장재수 진술조서 (2008.9.3.) 62) 신청인 박정숙 진술조서 (2008.9.2.) - 312 -